PHILOSOZZY

ESSAY / 001

틀린 음은 정말 실수일까

Is a Wrong Note Really a Mistake?

이미 연주된 음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음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다음에 짚는 음이다.

카프카
발행일
piano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지하철 창문에는 하루의 피로가 묻어난 얼굴들이 어두운 터널 벽을 배경으로 무표정하게 비친다. 덜컹거리는 차내의 규칙적인 레일 소음 속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켜고 끄다가, 문득 몇 시간 전의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어색한 단어, 동료와의 대화에서 타이밍을 놓쳐 엉뚱하게 얹어버린 한마디, 혹은 중요한 메일에 적어 보낸 사소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오타.

시계 위를 지나간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짧은 순간이 몇 번이고 슬로모션처럼 되감기된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조금만 더 침착하게 맥락을 살폈더라면 어땠을까.' 이미 끝난 대화를 혼자서 몇 번이고 고쳐 써보고, 그 순간 짧게 흘렀던 어색한 침묵의 공기를 곱씹는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지하철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생각은 방금 지나간 단 한 번의 어긋남 주변을 끝없이 맴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악보

우리는 왜 일상의 사소한 어긋남 앞에서 이토록 오래 서성일까. 그 밑바닥에는 삶이 정해진 악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고전적인 음악 체계에서 악보는 연주자가 따라야 할 정교한 설계도이자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이다. 작곡가가 지정한 음표와 쉼표, 정확하게 계산된 박자를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오음(wrong note)이자 연주의 결함으로 기록된다. 관객은 숨을 죽인 채 연주자가 그 정해진 선로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통과하는지 지켜본다. 거기서 실수란 잘 정돈된 규칙의 세계에 흠집을 내는 탈선이며, 연주자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흠으로 남는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도 그와 같은 엄격한 악보로 여기곤 한다. 계획대로 정돈된 일정,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화, 빈틈없이 설계된 하루라는 가상의 악보를 머릿속에 펼쳐둔 채 살아간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불협화음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그 단 하나의 어긋난 음 때문에 하루 전체가 망가져버렸다고 성급하게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실수가 남기는 무게는 음 그 자체의 크기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음이 울린 직후에 찾아오는 멈춤에서 비롯된다. 내가 잘못했다는 당혹감과 낭패감 때문에, 우리는 다음 마디로 나아가지 못한 채 방금 지나간 실패의 자리에 발이 묶여버린다.

잘못 짚은 화음이 울릴 때

하지만 고정된 악보가 없는 무대, 순간의 호흡과 날것의 청취로 다음 길을 열어가는 즉흥 연주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피아니스트였던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은 훗날 하버드 강연과 자서전에서 자신의 음악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어느 밤의 일화를 회고했다. 유럽 투어의 무대 위,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솔로가 절정에 달해 연주홀 전체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 순간이었다. 행콕은 데이비스의 강렬한 프레이징을 받치며 건반을 힘껏 눌렀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 짚은 코드였다. 거칠고 어색한 불협화음이 허공을 갈랐다.

행콕은 그 찰나에 자신이 그 완벽했던 무대를 망쳐버렸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건반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서늘한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솔로를 이어가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반 박자 숨을 고른 뒤, 행콕이 잘못 짚은 그 낯선 화음을 필연적인 화성 진행으로 바꾸어놓는 일련의 멜로디를 트럼펫으로 불어나갔다.

데이비스의 트럼펫을 거치자, 행콕의 어긋난 코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음 국면을 열어젖히는 대담한 전조(modulation)로 탈바꿈했다. 행콕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한다. 데이비스는 그것을 심판해야 할 '오류'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막 던져진 '새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피아노에는 틀린 음이 없다

이 일화는 텔로니어스 몽크의 음악적 태도와도 깊게 닿아 있다.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레이시(Steve Lacy)가 1960년 몽크와 함께 연주하며 손으로 기록한 메모에는 몽크가 남긴 짤막하지만 날카로운 조언들이 담겨 있다. 그중 가장 널리 회자되는 문장은 "피아노에는 틀린 음이란 없다"는 말이었다. 몽크는 어떤 음이 잘못된 것인지 옳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음 자체의 높낮이가 아니라, 오직 '그 음의 뒤에 무엇을 연주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몽크의 연주에서 반음으로 부딪히는 불협화음과 거친 악센트는 감추어야 할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끄러운 통념을 깨뜨리고 음악을 새로운 긴장과 가능성으로 밀어 올리는 단단한 디딤돌이었다.

재즈가 무대 위에서 불협화음을 다루는 이 태도를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사유 곁에 나란히 놓아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이미 주어진 조건, 즉 취소할 수 없는 '사실성(facticity)'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보았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이미 뱉어버린 말, 이미 건반을 눌러 공간 속으로 퍼져나간 음파를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로 세계에 남는다.

그러나 사르트르 사유의 핵심은, 그 사실성 자체에는 미리 정해진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점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어떤 의미가 주어질지는 오직 그 사건에 응답하는 인간의 '다음 선택과 행동(transcendence)'에 의해 사후적으로 완성된다.

잘못 짚은 화음에 걸려 넘어져 실수라는 수치심 속에 연주를 멈춘다면, 그 음은 영원히 '실패의 흉터'로 굳어진다. 하지만 그 어색한 음을 자신의 새로운 조건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음 화음으로 그것을 품어 안는다면, 그 음은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화성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의미는 과거의 결함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응답을 통해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

지나간 음 위에 얹는 다음 호흡

지하철역 출구를 나와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서면, 밤의 차가운 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든다. 낮 동안 마음에 걸렸던 어색한 말 한마디나 어긋난 계획이 여전히 머릿속 한구석을 맴돌지도 모른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일로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이미 공간 속으로 울려 퍼진 음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불협화음 때문에 오늘이라는 하루 전체가 실패로 끝났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삶은 완성된 악보를 실수 없이 복사해 내는 시험이라기보다, 매 순간 주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조건 위에서 조심스럽게 응답해 나가는 긴 즉흥에 가깝기 때문이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면서 내 목소리를 내는 법을 고민하듯, 혹은 말할 수 없는 순간을 침묵으로 품어 안듯,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코드를 짚어나간다.

실수 그 자체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다음 선택을 기다리는 낯선 시작일 뿐이다. 어쩌면 지나간 불협화음의 어색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소리가 멎은 자리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짚어나갈 다음 한 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