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57
상은 남의 몫, 책상은 나의 몫
The Desk and the Prize
타인의 심사와 세상의 트로피는 내가 손댈 수 없는 몫이지만, 내일 책상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는 것은 오직 나의 몫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스마트폰 화면은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스웨덴 한림원의 단상 위에서 낯선 외국어 이름 하나가 호명되는 순간, 각종 뉴스 속보와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는 늘 되풀이되는 탄식이 도미노처럼 쏟아진다.
"이번에도 하루키는 못 받았네."
"도대체 언제 주려는 걸까. 이쯤 되면 일부러 안 주는 것 아닌가."
술자리의 맥주잔 사이에서도,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에서도 막 호명된 수상자의 작품 세계보다 비껴간 일본 소설가의 이름이 더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린다. 영국 도박 사이트의 배당률 순위표를 캡처한 이미지들이 오가고, 문학평론가들의 엇갈리는 해석이 늦은 밤까지 허공을 맴돈다. 그 소란을 넘기다 보면 기묘한 기분이 든다. 글을 쓴 당사자는 일본이나 하와이의 어느 방에서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인데, 바다 건너의 보통 사람들은 왜 타인의 탈락에 이토록 안타까워하며 분주해지는 것일까.
우리가 남의 수상 실패에 감정이입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풍경이 타인의 잣대로 매겨지는 현대인의 일상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분기마다 돌아오는 인사고과 평가표, 공모전 탈락 통보 메일, 숫자로 환산되는 수많은 실적 지표 앞에서 우리는 늘 누군가의 결재와 채점을 기다리는 영원한 후보생으로 살아간다. 열심히 달렸지만 이번에도 호명되지 못했다는 감각,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섣부른 위로("다음엔 잘될 거야") 앞에서 지어야 하는 어색한 표정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은 2015년에 펴낸 저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문학상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분명하게 적어 두었다. 그는 상이란 작가에게 부차적인 장식물일 뿐이며, 아쿠타가와상이든 노벨상이든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이 써 내려간 소설의 실체가 훼손되는 일은 없다고 선언한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서점 매대에 꽂혀 독자의 손에 들리는 책이 진짜 결과물이며, 작가가 매달려야 할 본질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원고지 열 장을 채우고 10km를 달리는 신체적 규율이라는 것이다.
남의 손에 들린 심사표에 흔들리지 않는 일상의 규율은, 기원후 1세기 로마의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남긴 오래된 기준과 통한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요약서 《엥케이리디온》의 첫머리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두 갈래로 엄격하게 쪼갰다.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일과, 내 힘이 닿지 않는 일이다. 어떤 판단을 내리고 무엇을 선택할지, 눈앞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온전히 내 손에 쥐여 있다. 반면에 몸의 질병, 재산의 증감, 타인이 내리는 평판, 관직이나 상패는 결코 내가 좌우할 수 있는 영역에 놓여 있지 않다.
에픽테토스는 타인이 건네는 인정이나 사회적 영예를 갈망하는 순간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권한을 쥔 타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들이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 회사의 인사위원회가 나에게 어떤 등급을 매길지는 애초에 내가 손댈 수 없는 저쪽의 몫이다. 타인이 쥐고 흔드는 주사위의 눈을 바라보며 밤새 애를 태우는 사람은, 자기 삶의 주권을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과 다름없다.
1965년 5월, 미국의 재즈 거장 듀크 엘링턴 역시 권위주의적 제도의 냉대를 마주해야 했다. 퓰리처상 음악 부문 심사위원단은 당시 예순여섯 살이던 엘링턴에게 재즈 음악인 최초로 특별공로상을 수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이사회에 추천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만을 정통 예술로 인정하던 보수적인 퓰리처 이사회는 추천을 기각하고 "올해는 수상자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격분한 심사위원 두 명이 항의하며 사임할 정도로 노골적인 배제였다.
모두가 엘링턴의 분노나 울분을 예상하고 마이크를 들이댔을 때, 기자회견장에 선 엘링턴은 엷은 미소를 띠며 한마디를 남겼다.
"운명이 내게 친절하군요. 내가 너무 어릴 때 유명해지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칠순을 바라보는 노음악가가 남긴 이 우아한 역설은, 제도의 오만함을 꿰뚫는 단호한 쉼표였다. 엘링턴은 신문사를 향해 격렬한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밤을 지새우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밤 예정되어 있던 투어 콘서트 무대에 올랐고, 자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평소와 다름없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스윙의 악센트를 뿜어냈다. 그에게 진실은 위원회가 인쇄해 주는 표창장이 아니라, 손가락과 건반이 부딪히며 매일 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생생한 화음 속에 있었다.
퓰리처상의 소란이 지나간 이듬해 말, 엘링턴과 그의 오케스트라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앨범 《The Far East Suite》의 수록곡 〈Isfahan〉을 들으면 그가 지키려 했던 음악의 태도가 선명하게 귀에 닿는다. 오랜 음악적 동반자 조니 호지스의 알토 색소폰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를 때, 엘링턴의 피아노는 결코 멜로디를 앞지르거나 과시하려 들지 않는다. 음표와 음표 사이에 넉넉한 쉼표를 두고 건반 위에 얹어놓는 몇 개의 화음만으로, 그는 음악 전체에 느긋한 보폭과 숨 쉴 틈을 열어준다. 세상의 상패를 놓쳤다고 해서 조급해지거나 분노로 소리를 밀어붙이지 않는, 담백하고 느긋한 호흡이다.
제도의 평가 앞에서 존엄을 지킨 태도로 흔히 거론되는 또 다른 인물도 있다.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던 장 폴 사르트르다. 사르트르는 작가가 공적 기관이나 훈장에 의해 박제화되어서는 안 된다며 수상을 거절하는 성명을 르 피가로에 보냈다. 그것은 제도와의 영웅적이고 극적인 대결이었으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거부가 전 세계를 겨냥한 극적 연출이었고, 하루키의 무심함이 수천만 부를 판매한 탄탄한 독자층과 경제적 자립이라는 안전판 위에서 가능했던 일이라면, 아무런 트로피도 기댈 성채도 쥐지 못한 평범한 우리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가. 회사 승진에서 누락되고, 공모전에서 미끄러진 채 텅 빈 모니터를 마주하는 보통의 사람에게 사르트르식의 영웅적 거부나 대작가의 무심한 낯빛은 손에 닿지 않는 사치처럼 보이기 쉽다. 보장된 내일이 없는 이들에게 타인의 평가는 밥벌이와 직결된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듀크 엘링턴과 에픽테토스가 가리키는 방향은 현실을 외면하는 체념이 아니다. 타인의 참견과 외부의 판정 앞에서 즉각적으로 해명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리듬의 기술이다. 상대가 던지는 동정이나 핀잔의 말 사이에 한 박자의 여백을 두고, 내가 바꿀 수 없는 결과를 향해 뻗어 있던 시선을 거두어 오늘 내가 쥘 수 있는 책상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재즈 연주자가 열두 마디 블루스라는 엄격한 규칙을 붙들 때 비로소 자유로운 즉흥의 멜로디를 건져 올리듯, 사람을 불안에서 구원하는 힘은 자발적으로 세운 일상의 제약에서 나온다. '내일 아침 출근해 책상 앞에 앉는 두 시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써 내려가는 세 줄의 메모'라는 구체적인 규율 속으로 하루의 리듬을 모아들일 때, 외부의 평가는 삶의 중심을 흔드는 지진이 아니라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로 가벼워진다.
금을 새겨 넣은 트로피를 손에 쥐여줄지 말지는 타인의 몫이지만, 내일 아침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아 볼펜 뚜껑을 열거나 키보드에 손을 얹는 것은 오직 나의 몫이다. 타인이 주는 상을 삶의 목적지로 삼으면 우리는 영원히 초조한 피평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주어진 두 시간을 탈 없이 마치는 행위 자체를 나만의 완료로 삼는다면, 세상의 심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에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밤새 화면을 달구던 노벨상의 소란은 서서히 식어가고 거리는 평소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어제의 호명에서 비껴간 사람도, 어제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도 결국은 각자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를 뺀다.
세상이 건네는 상패란 언제나 시대의 변덕과 우연이 뒤섞인 바람에 불과하다. 바람의 방향을 원망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책상 위로 손을 뻗어 오늘 내 몫의 문장과 노동을 첫 줄부터 시작하는 일. 그 작은 착수가 있는 한, 누구도 우리의 하루를 실패라 부를 수 없다.
출처
- Novelist as a VocationAlfred A. Knopf / Switch Publishing (Haruki Murakami, 2015/2022)원전
-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Alfred A. Knopf (Haruki Murakami, 2007/2008)원전
- Enchiridion (The Handbook)Oxford World's Classics (Epictetus, trans. Anthony Long, 2008)원전
- Music Is My MistressDoubleday & Company (Duke Ellington, 1973)원전
- Duke Ellington's AmericaUniversity of Chicago Press (Harvey G. Cohen, 2010)
- Le Figaro Statement on Nobel Prize RefusalLe Figaro / The New York Times Archives (Jean-Paul Sartre, 1964)원전
- The Far East Suite (Album)RCA Victor (Duke Ellington and His Orchestra, 1967)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