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52
바나나 껍질을 밟은 시지프
Sisyphus on a Banana Peel
바위를 밀어 올리다 미끄러져도,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진 광대처럼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밤 11시 20분, 길고 피로했던 하루를 겨우 버텨내고 돌아온 방 안. 외투를 벗어둘 기운도 없이 작은 접이식 밥상을 펴고, 하루의 첫 온기나 다름없는 따뜻한 국그릇을 올려놓는다. 마침내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이제야 조촐한 평온을 한 입 넘기려던 참이다. 어둠이 내린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별안간 허공을 향해 발톱을 세우며 질주를 시작한다. 아무런 징조도 이유도 없는 심야의 달리기. 방바닥을 맹렬한 속도로 미끄러지듯 내달리던 녀석이 밥상 모서리를 그대로 들이받고 허공으로 솟구친다.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밥상이 기우뚱 뒤집히고, 갓 데운 국물이 사방으로 튀며 그릇이 장판 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다.
양말 밑바닥으로 미지근한 국물이 흥건하게 스며든다. 붉은 기름기가 번져나가는 바닥과 어지럽게 튄 밥풀을 멍하니 내려다본다. 저 멀리 책장 뒤로 몸을 숨긴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악의를 품고 저지른 일도 아니고, 멱살을 잡고 논리적으로 따져 물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배는 고프고, 방은 엉망이며, 하루의 끝자락에서 남은 기운은 바닥났다. 화를 내자니 대상이 없고, 주저앉아 한탄하자니 꼴이 우습다. 목구멍 안쪽에서 턱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며 기어이 실소가 터진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서 터져 나오는 메마른 웃음이다.
살면서 공들인 계획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마주할 때, 세상은 대개 우리에게 비장한 표정을 요구하곤 한다. 실패를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악물며 다음을 기약하거나, 상처 입은 주인공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도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정작 삶의 한복판에서 논리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무자비한 벽에 부딪힐 때, 그런 엄숙함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다. 애초에 납득할 만한 이유나 규칙이 없는 곳에서 진지한 얼굴을 짓고 있으면, 오히려 세상이 멋대로 휘두르는 불합리 앞에 나 자신을 무력한 희생양으로 바치는 꼴이 되고 만다. 이유를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맹목적인 우연 앞에서, 인간이 쥐어짜 낸 비장함은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이유를 물어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세계, 그 막막한 불합리의 조건을 일찌감치 정면으로 응시한 사유가 있다. 1942년 알베르 카뮈가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파고든 질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향해 명쾌한 질서와 이유를 묻지만, 세계는 차가운 침묵과 혼란으로 답할 뿐이다. 카뮈는 이 어긋남과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 그 자체라고 짚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는 신들을 속인 대가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온 힘을 다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는 가차 없이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는 다시 산을 내려가 그 바위를 어깨로 받아내야 한다.
카뮈가 주목한 것은 바위가 굴러떨어진 직후, 산 아래를 향해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이었다. 그 순간 시지프는 자신이 처한 운명의 참담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내일도 모레도 이 형벌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그를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거짓된 희망에 기대어 신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고, 절망에 겨워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은 채, 매 순간 바위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명징한 의식이야말로 세계의 침묵에 맞서는 가장 꼿꼿한 반항이라고 보았다. 카뮈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선언한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하지만 카뮈의 시지프는 결코 웃지 않는다. 그는 어깨에 얹힌 바위의 하중을 고결하게 응시하며, 비장한 영웅의 침묵 속에 머무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반항이 그처럼 비장한 침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가혹한 질서가 조여오는 일상 앞에서도 엄숙함의 갑옷을 벗어던진 이들이 있었다. 1940년대 뉴욕 52번가, 짐 크로우 법률의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쇼비즈니스의 착취 속에서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는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이라는 새로운 어법을 밀어 올렸다. 이전까지 백인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하던 매끄러운 스윙 댄스 음악의 껍질을 깨고, 숨이 턱에 닿는 초고속 템포와 낯선 반음계 화성으로 가득 찬 전위적 음악을 연주했다. 그것은 흑인 음악가를 그저 흥을 돋우는 구경거리로 소비하려던 주류 사회를 향한 지적인 선언이었다.
동료들이 차별의 압박과 예술적 고뇌에 짓눌려 약물과 파멸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갈 때, 디지 길레스피는 무대 위에서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트럼펫을 불 때 양 볼을 개구리처럼 잔뜩 부풀렸고, 뿔테 안경과 베레모를 쓴 채 엉뚱한 스텝을 밟으며 관객을 향해 넉살 좋게 농담을 던졌다. 1945년 5월 11일 녹음된 역사적인 트랙 〈Salt Peanuts〉에서 그는 인간의 연주 한계를 시험하는 폭발적인 브라스 솔로를 뿜어내다가, 한순간 음악을 멈추고 장난기 어린 가성으로 외친다. '솔트 피너츠! 솔트 피너츠!' 볶은 땅콩이라는 아무런 심오한 뜻도 없는 단어 하나를 천진하게 던져놓고, 다시 번개 같은 속도로 악기를 물어뜯는다.
훗날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후배들은 그의 이런 쇼맨십을 두고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지 길레스피는 1979년 발표한 자서전에서 분명하게 반박했다. 음악이란 세상 그 무엇보다 진지해야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그는 적었다. 혹독한 차별과 편견이 가하는 억압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비장하게 굴었다면 그의 영혼은 진작에 바스러졌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터뜨린 그의 웃음과 장난기는 굴종이 아니라, 가혹한 세계가 던지는 비극의 독기를 단숨에 빼내는 해독제였다.
세상이 들이미는 비극의 대본에 깔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광대의 탈을 쓰는 태도는, 재즈 클럽의 무대를 넘어 홍콩의 낡은 영화 세트장에서도 똑같이 되살아난다. 1999년 영화 《희극지왕》에서 주성치가 연기한 사우는 번듯한 배역 하나 얻지 못하는 무명 엑스트라다. 낡은 복덕방 구석에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두꺼운 연기론 책 《배우수업》을 보물처럼 꽂아두고, 마을 주민들에게 무료로 연기를 가르친다. 촬영장에 불려 나가서는 총을 맞고도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았다며 죽지 않고 버티다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식사 시간이 되면 배식 담당자에게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도시락 한 통조차 얻어먹지 못한다.
온갖 멸시와 모욕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사우는 카뮈의 시지프처럼 바위의 하중을 버텨내며 비장한 영웅의 표정을 짓지 않는다. 상대방이 온 힘을 다해 내리꽂은 모욕의 주먹 앞에서, 그는 심각해지는 대신 뜬금없는 표정 연기를 펼치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진 광대처럼 실소를 터뜨리며 바닥을 구르고, 흙투성이가 된 재킷을 털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사실, 난 연기자다.'
신화 속 시지프가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고결하게 응시하며 비장한 영웅으로 남았다면, 주성치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을 차라리 광대로 만들어버린다. 카뮈가 정식화한 반항이 고통의 하중을 정면으로 짊어지는 숭고한 침묵이라면, 주성치의 방식은 그 하중 자체를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쪽에 가깝다. 만약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카뮈식의 엄숙함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식도 배려도 없는 세상이 던지는 모욕 앞에서 매번 영웅처럼 결연한 표정만 짓고 있다면, 우리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속부터 바스러지고 말 것이다. 악의와 억지가 판치는 현실에서 홀로 비장해지는 일은, 역설적으로 상대가 던진 돌의 충격을 고스란히 제 몸으로 다 받아내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주성치가 택한 헛웃음은 그 타격점 자체를 지워버린다. 스스로를 조롱거리의 위치로 낮추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를 짓밟으려던 현실의 폭력은 헛발질을 하며 허공을 가른다. 내가 먼저 광대의 가면을 써버렸으니, 세상은 나를 비참한 패배자로 완성하지 못한다. 이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비겁한 도피가 아니다. 상대가 내민 비극의 대본에 휘말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 몫의 품위를 지켜내며 현실의 하중을 일시적으로 증발시키는 기민한 방어술이다.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의 어지러운 방 한구석이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길목에 서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하루의 잔해를 내려다본다. 공들여 쌓은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상식 밖의 억지가 나를 조여올 때, 굳이 영웅처럼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턱 빠진 실소를 터뜨려도 괜찮다. 바위가 발등을 찍고 다시 굴러떨어졌을 때, 흙 묻은 무릎을 털며 터뜨리는 그 메마른 웃음이야말로 우리를 비참함의 늪에서 건져 올리는 작은 숨구멍이 되어 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이 끝내 꺾지 못한 엉뚱하고 고요한 미소가 걸려 있다.
출처
- Le Mythe de SisypheEditions Gallimard (Albert Camus, 1942)원전
- King of Comedy (喜劇之王)The Star Overseas Ltd. (Stephen Chow & Lee Lik-chi, 1999)원전
- To Be, or Not... to Bop: Memoirs of Dizzy GillespieDoubleday (Dizzy Gillespie & Al Fraser, 1979)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원전
- Salt Peanuts (Guild 1003)Guild Records (Dizzy Gillespie and His All Stars, 1945)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