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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051

과장된 맞장구 없이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꾸며내지 않는 일은 무례가 아니라, 상반된 두 태도 사이에서 나만의 기준점을 세우는 정중한 예의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알베르 카뮈 · 셀로니어스 몽크 · 침묵과 여백
과장된 맞장구 없이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평일 늦은 오후, 사무실 근처 카페 구석의 둥근 탁자에 마주 앉는다. 동료는 꽤 상기된 목소리로 지난 주말에 다녀온 여행이나 새로 장만한 물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스마트폰 속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이며 상대는 내 얼굴을 바짝 살핀다. 지금 자신이 털어놓는 일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고 있는지, 얼마나 열렬하게 호응해 주는지 가늠하려는 눈빛이다.

아직 내 마음속에는 어떤 감흥도, 특별한 호기심도 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모니터 앞에서 씨름하던 미완의 보고서와 뻐근한 어깨의 감각이 여전히 신경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침묵이 1초 이상 길어지면 무언가 어색해질 것 같다는 조바심이 먼저 고개를 든다.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와, 정말요? 너무 좋았겠네요.' 목소리의 톤은 평소보다 반 옥타브쯤 올라가 있고, 입술 끝에는 어색하게 빚어낸 미소가 걸려 있다.

상대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음 사진을 넘길 때,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문득 목구멍 안쪽이 텁텁해진다. 방금 내 얼굴에 걸렸던 표정이 내 마음에서 차오른 것이 아니라, 어색한 침묵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빌려온 남의 각본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카페를 나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지는 순간 뺨과 입술 주변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풀린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감정의 대본을 마주한다. 동료의 소소한 자랑 앞에서는 눈을 반짝여야 하고,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소식 아래에는 쏟아지는 이모티콘의 행렬에 뒤처지지 않으려 축하나 위로의 문구를 보탠다. 회식 모임에서는 상사의 썰렁한 농담에 타이밍을 맞추어 웃음을 터뜨리고, 지인의 넋두리를 들을 때는 적당한 안타까움을 얼굴에 띄운다.

그 연출을 잠시라도 빠뜨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는 즉각 어색해진다. 그저 묵묵하게 듣고만 있는 이는 차갑거나 삐딱하다는 오해를 받기 쉽고, 남들처럼 요란한 추임새를 넣지 않는 태도는 관계에 성의가 없다는 눈총으로 돌아온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일상의 모든 상호작용을 연극 공연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 전면에서 사회가 기대하는 배역에 맞춰 표정과 몸짓을 다듬는 인상 관리를 수행한다. 그 공간에서 요구되는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상호작용의 질서를 깨뜨린 사람으로 지목된다.

앨리 훅실드가 관찰했듯, 현대의 규범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물론 마음속 깊은 곳의 정서까지 사회적 규칙에 맞추어 조작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마음에도 없는 맞장구를 치고 돌아서는 순간, 자책이 고개를 든다. '왜 나는 남들처럼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기뻐하지 못할까.' 정해진 표정을 연기하지 않고는 타인과 한 공간에 머물 수 없다는 불안이 매일의 피로를 쌓아 올린다.

1942년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바로 이 정해진 연극을 거부한 인물이다. 마렝고 양로원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를 받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뫼르소는 버스를 타고 양로원으로 향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그는 관 뚜껑을 열어 얼굴을 보겠느냐는 문지기의 제안을 사양한다. 고인의 시신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대신 피로를 느끼고, 문지기가 건네는 따뜻한 밀크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알제를 떠나 마렝고로 향하는 내내, 온몸을 짓누르는 열기와 먼지, 쏟아지는 졸음이라는 물리적 감각이 슬픔보다 먼저 그의 의식을 채운다. 장례식을 마친 이튿날 알제로 돌아온 그는 직장 옛 동료 마리와 바다 수영을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함께 웃고 밤을 보낸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뫼르소는 해변에서 눈을 찌르는 햇빛 때문에 한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러나 법정에 선 그에게 쏟아지는 질문들은 살인의 경위가 아니다. 판사와 검사, 배심원들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장례식에서 관 앞에서 커피를 마신 일, 담배를 피운 일, 이튿날 희극영화를 보고 여자와 사랑을 나눈 일이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비탄을 보이지 않았다는 도덕적 흠결을 들어 그를 단두대에 세운다. 십자가를 들이대며 참회를 요구하는 예심판사를 향해 뫼르소는 거짓된 회개를 꾸며대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참회라기보다 일종의 귀찮음일 뿐이라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털어놓는다.

카뮈는 1955년 미국판 서문에서 뫼르소의 비극을 명쾌하게 요약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뫼르소는 사회의 거짓된 연극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카뮈가 짚었듯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느끼는 것 이상의 감정을 꾸며내는 행위까지 망라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을 위장하지 않았고, 사회는 자신의 각본을 따르지 않는 그 투명함을 마주하고 거대한 위협을 느꼈다.

뫼르소가 보여준 위선의 거부는 통쾌한 해방감을 준다. 세상이 요구하는 수다스러운 도덕과 과장된 호응 뒤에 도사린 허위를 날카롭게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를 섣불리 삶의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뫼르소가 거짓을 거부한 선택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까지 완전히 놓아버린 무심함과 얽혀 있었다. 자신의 신체 감각에만 침잠한 채 타인의 존재를 외면하는 태도는, 현실의 돌발적인 위기 앞에서도 자신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단두대라는 파국으로 끝을 맺었다.

마음에도 없는 표정을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마주 앉은 상대의 시간과 존재를 업신여겨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내 감정에만 몰두하여 타인의 무구한 말과 표정을 냉소적으로 깔보거나 무시하는 일은 용기가 아니라 얄팍한 오만에 불과하다. 타인을 함부로 내려다보지 않으면서도 내 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는 일은, 맹목적인 냉소보다 훨씬 더 무거운 긴장을 견뎌야 하는 과제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일상에서 뫼르소처럼 모든 무대를 깨부수고 파국으로 걸어갈 수는 없다.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바탕이다. 사실 삶에서 단 하나의 완벽한 정답으로 남을 수 있는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에는 고프먼이 포착한 사회적 무대의 지혜가 있다. 서로의 체면을 지켜주고 어색한 침묵을 메우며, 함께 머무는 공간을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일상의 의례를 치르고 정해진 배역을 감당하는 태도 역시 타인을 향한 소중한 배려다. 다른 한편에는 카뮈와 디디온이 붙든 엄격한 내면의 뼈대가 있다. 세상의 시선과 분위기에 휩쓸려 거짓 감정을 남발하지 않고, 스스로 느끼는 바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태도다. 이 두 태도는 팽팽하게 맞서지만,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인 정답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타인을 향한 배려 없는 솔직함은 난폭한 무례가 되고, 내면의 진실이 거세된 배려는 껍데기만 남은 속임수가 되기 때문이다.

2003년 겨울, 미국의 작가 조안 디디온의 저녁 식탁에서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이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디디온은 세상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산문집 《상실》에서 가슴을 쥐어뜯는 비탄의 수사를 늘어놓는 대신, 앰뷸런스의 도착 시간, 의사들의 건조한 대화, 병원의 진단서에 적힌 문장들을 응시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사태를 막고자 사실의 정확성을 끝까지 붙들었다.

디디온은 에세이 〈자기존중감에 대하여〉에서 자기존중이란 타인의 호감이나 박수갈채를 얻으려는 처세술과 거리가 멀다고 적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일들을 핑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당하는 내적 규율이다. 뫼르소의 무표정이 타인을 향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방치였다면, 디디온의 건조한 기록은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해 갈고닦은 절제였다. 고프먼이 관찰한 사회적 무대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공간에서 예의를 다해 상대를 대하되 내면의 중심까지 배역에 넘겨주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정답이라 믿고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 매 순간 나만의 고유한 기준점을 세우는 일이다. 타인을 업신여기지 않는 정중한 태도를 지키면서도, 마음에도 없는 과장된 표정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 선을 스스로 긋는 일이다.

카페 테이블에서 맞은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억지로 감탄사를 쏟아내며 과장된 표정을 짓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상대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기 위한 선택이다. 반 옥타브 높은 목소리와 억지 미소의 거품을 걷어내는 대신,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호흡을 맞추고 경청하는 태도 속에는 충분한 온기가 깃들어 있다. 업무 메신저에서 불필요한 과장과 습관적인 이모티콘을 덜어내더라도, 명확한 사실과 깍듯한 어조로 답한다면 존중은 빈틈없이 전달된다.

느끼지 않는 감정을 꾸며내지 않는 일은 차가움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깎아내리기 위한 냉담함이 아니라, 훗날 내 마음에 진짜 슬픔이나 기쁨이 닥쳐왔을 때 흘릴 눈물이 지닌 무게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스스로와 상대를 향한 엄격한 예의다.

내일 오후 누군가 들뜬 목소리로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 때, 1초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고 숨을 고른다. 어색하게 지어낸 미소를 거두고,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본래의 속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진실함. 그 상반된 두 세계의 긴장 속에서 찾아낸 나만의 기준점으로, 우리는 더 담백하고 깊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

출처

  1. L'Étranger & Preface to the American University Edition (1955)Editions Gallimard (Albert Camus, 1942) / Vintage Books원전
  2.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Doubleday Anchor Books (Erving Goffman, 1959) / Penguin Books원전
  3. On Self-Respect & The Year of Magical ThinkingFarrar, Straus and Giroux (Joan Didion, 1968) / Alfred A. Knopf (2005)원전
  4. L'Être et le Néant: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Editions Gallimard (Jean-Paul Sartre, 1943)원전
  5.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rlie Russell Hochschild, 1983)원전
  6. Thelonious Himself (Riverside RLP 12-235)Riverside Records (Thelonious Monk, produced by Orrin Keepnews, 1957)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