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50

건너는 사람에게 강은 이름을 묻지 않는다

생계를 위한 명함을 성실히 쥐되, 그 이름에 삶 전체를 가두지 않는 뱃사공의 지혜.

글
사월
발행일
주제
헤르만 헤세 · 매코이 타이너 · 즉흥
강 위의 한 사람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이력서나 온라인 프로필의 자기소개 칸을 채우려다 보면, 빈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유난히 길어진다. 그 네모 칸 안에는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증명해 줄 명사들이 들어서야 한다. 직함, 소속, 연차, 다룰 줄 아는 도구들의 목록,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일궈낸 성과의 숫자들. 자판을 몇 줄 두드리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화면에 적힌 문장 속의 나는 꽤 유능하고, 흔들림 없이 한 방향으로 전진해 온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니터 불빛에 비친 손등을 내려다볼 때 스치는 감각은 사뭇 다르다. 지난 한 주 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판단 착오들,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에 몇 시간 동안 마음을 다쳤던 일, 기획이 틀어져 혼자 한숨을 삼키던 오후의 피로가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면 위의 번듯한 소개글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생활인의 실체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틈이 깊게 벌어진다. 밥벌이를 위해 나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가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과장된 수식어들을 바라볼 때 목구멍 안쪽이 텁텁해진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언제나 완성된 사람, 결함 없는 전문가라는 굳은 껍질 속에 집어넣어야만 안도하는가.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완벽한 정답을 쥔 존재가 되라고 다그친다. 이른바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다.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자신을 하나의 선명한 명사로 규정하고, 시장에서 잘 팔리는 브랜드로 포장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가 일상을 옥죈다. 실패 없는 성공 방정식을 가르쳐주겠다는 책들이 서점 매대를 뒤덮고, SNS 피드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커리어를 쌓아 올린 이들의 화려한 인증 사진이 넘쳐난다. 그 세계에서 실수나 방황은 무능의 증거일 뿐이다.

가식적인 자기 포장과 브랜딩의 압박에 숨이 턱 끝까지 찰 때면, 차라리 세상이 쥐여준 명함 따위는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생활인에게 삶은 그런 낭만적인 도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속세를 등진 채 숲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달 돌아오는 월세와 공과금,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생활인의 책임은 엄연하다. 시장이 원하는 언어로 나를 증명하고, 클라이언트나 고용주의 요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을 따내야만 밥상이 차려진다. 생계를 위한 타협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성실하고 정당한 노동의 몫이다.

문제는 그 노동의 가면이 퇴근길 지하철 안까지, 심지어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낮 동안 생계를 위해 둘러썼던 명함과 직함이라는 껍질을, 어느새 내 영혼의 유일한 크기이자 전부로 착각하는 순간 숨이 가빠진다. 회사가 부여한 타이틀이 흔들리거나 프로젝트가 엎어질 때, 우리는 단지 일자리를 잃는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공황에 빠진다. 밥벌이의 가면을 성실하게 쓰면서도, 그 가면 속에 내 삶 전체를 질식시키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1919년 봄, 스위스 남부 티치노주의 시골 마을 몬타뇰라의 낡은 건물 카사 카무치로 한 작가가 숨어들었다. 마흔두 살의 헤르만 헤세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 평화주의 글을 썼다는 이유로 조국 독일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부친의 사망과 아내의 조현병 입원, 어린 아들의 투병이 겹치며 그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융의 제자인 정신분석의 랑 박사에게 수백 차례의 상담을 받으며 간신히 숨을 붙들고 있던 처지였다.

헤세는 그곳에서 소설 《싯다르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부를 마친 뒤 그는 1920년 봄부터 무려 1년 반 동안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하는 극심한 창작 정체에 빠졌다. 세속을 초월한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정작 매일 생계와 신경통으로 신음하는 자기 자신이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세는 모든 것을 초탈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밀린 방세를 걱정해야 했고, 잡지에 작은 서평을 기고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불완전한 생활인이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정원의 흙을 파서 잡초를 뽑았으며, 서툰 붓질로 작은 수채화를 그려 엽서로 팔아 푼돈을 벌었다. 위대한 문호라는 허명을 벗어던진 채, 밥벌이의 고단함과 매일 찾아오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견뎌냈다.

그가 완성한 소설 속 싯다르타의 여정 역시 현실의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싯다르타는 완벽한 교리를 설파하는 스승의 곁을 떠난 뒤, 세속의 도시로 들어가 상인 카마스바미 밑에서 쌀과 기름을 거래하는 장사치로 살았다. 그는 밥벌이의 기술을 배웠고, 돈의 위력을 알았으며, 세속의 쾌락과 타락을 겪었다. 삶의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져 자아의 오만함이 완전히 부서졌을 때, 싯다르타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강가였다.

그곳에는 늙은 뱃사공 바수데바가 살고 있었다. 바수데바는 무소유를 외치며 강가에 앉아 도를 닦는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는 매일 낡은 나룻배를 강물에 띄우고, 건너가려는 사람들을 태워 노를 저어준 뒤 손님들에게 땡전 몇 푼의 뱃삯을 꼬박꼬박 챙겨 받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바수데바는 밥벌이의 엄중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싯다르타에게 보여준 것은 거창한 설교가 아니라, 매일 강물 위에 배를 띄우며 살아가는 담백한 노동의 몸짓이었다.

바수데바의 나룻배 위에서는 누구도 세상의 직함으로 불리지 않는다. 뱃사공은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배에 올라탄 사람이 화려한 비단을 두른 귀족이든, 남루한 옷을 걸친 거렁뱅이든, 뱃사공이 받는 뱃삯과 손에 쥐는 노의 감각은 똑같다. 강물 역시 배를 탄 사람의 성공이나 실패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그 순간 배 밑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물결의 저항과 흐름만을 받아줄 뿐이다.

바수데바는 늙은 뱃사공이라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에게 나룻배의 노는 밥벌이를 해결하고 세상을 건너기 위한 도구였을 뿐, 자아를 가두는 성벽이 아니었다. 낮 동안 그는 손님을 맞이하고 뱃삯을 받으며 세상의 규칙에 성실하게 응답했다. 그리고 해가 지면 강물이 들려주는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물소리 속에는 기쁨의 탄성과 함께 좌절한 이들의 신음, 분노, 슬픔이 한데 뒤섞여 거대한 하나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뱃사공에게서 발견하는 태도는 명함을 내던지고 세상 밖으로 달아나는 도피가 아니다. 낮에는 밥벌이를 위해 정성껏 명함을 내밀고, 자신에게 맡겨진 직함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다. 그것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정당하고 떳떳한 생존의 기술이다. 프로필에 유능한 경력을 적어 넣고 세상의 기준을 맞추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위선이 아니다. 명함은 오늘 하루 나룻배를 젓게 해주는 작은 노일 뿐, 내 존재의 전부를 가두는 족쇄가 될 수는 없다.

재즈 연주자가 무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즈 연주자는 오늘 밤 무대에 서기 위해 수천 번의 기초 연습을 거치고, 연주료를 받는 현실의 계약에 서명한다. 하지만 일단 연주가 시작되면, 사전에 짜놓은 완벽한 악보에 집착하지 않고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불협화음을 다음 음표로 삼아 유연하게 변주를 이어간다. 밥벌이의 규칙을 존중하되, 그 규칙에 영혼의 호흡까지 굳어버리게 두지 않는 유연함이다.

책상 위의 노트북 화면을 다시 바라본다. 프로필의 빈칸에 내일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몇 줄의 이력과 직함을 차분하게 적어 넣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밥벌이를 위해 나를 설명하는 명사를 가다듬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내일 아침 우리는 다시 그 명함을 들고 일터로 향할 것이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는 물결이 지날 수 있는 틈을 열어둔다. 낮 동안의 노동에 온 힘을 다하되, 명함의 압박에 영혼까지 짓눌리지는 않도록. 강물은 건너는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밥벌이의 고단함 속에서도 나를 증명하려는 안간힘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지치지 않고 내 몫의 노를 저어갈 수 있다. 창밖으로 깊어가는 밤의 도시 위로, 불빛들이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출처

  1. Siddhartha: Eine indische DichtungS. Fischer Verlag (Hermann Hesse, 1922) / Suhrkamp Verlag원전
  2. Briefe & Ausgewählte Briefe (1919-1922, Montagnola)Suhrkamp Verlag (Hermann Hesse, ed. Volker Michels)원전
  3. Hermann Hesse: 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 & Sein Leben in Bildern und TextenCarl Hanser Verlag (Gunnar Decker, 2012) / Suhrkamp (Volker Michels)
  4. 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 & Mahāparinibbāna Sutta (DN 16)Pali Text Society / Oxford University Press원전
  5.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Collected Works Vol. 7)Princeton University Press (Carl Gustav Jung, Bollingen Series)원전
  6. The Real McCoy (Blue Note BST 84264)Blue Note Records (McCoy Tyner, recorded by Rudy Van Gelder)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