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49

내일 도착할 상자는 나를 구하지 못한다

The Box Arriving Tomorrow Cannot Save Me

남들이 다 산다고 해서 나한테도 필요한 건 아니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소크라테스 · 단순함과 자족
수많은 박스

방 안의 불을 끄고 누우면 스마트폰 화면의 창백한 푸른빛만이 턱밑을 비춘다.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엄지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쇼핑 앱의 피드를 아래로 쓸어내린다. 특별히 사야 할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를 끝낸 뒤, 긴장이 풀린 틈으로 밀려드는 공허함을 메우려는 버릇에 가깝다.

화면 속 장바구니에는 며칠 전부터 담아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무광으로 마감된 짙은 회색 머그컵, 오트밀 색상의 울 머플러, 책상 위를 정리해 준다는 아크릴 수납함. 상세 페이지마다 붉은색 글씨로 깜빡이는 문구들이 시선을 끈다. 마감 세 시간 전, 오늘 주문 시 내일 아침 도착, 남은 수량 두 개.

가격을 합산한 숫자가 화면 아래에 떠오른다. 엄지손가락이 주황색 구매 버튼 바로 위에서 맴돈다. 지문 인식 한 번이면 몇 초 만에 결제가 끝나고, 내일 퇴근길 문 앞에는 단단한 골판지 상자가 놓여 있을 것이다. 상자를 칼로 가르고 완충재를 뜯어낼 때의 찰나 같은 쾌감이 손끝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손가락은 마지막 문턱에서 멈칫거린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켜진 화면을 바라보는 사이, 손끝에는 묘한 망설임이 감돈다. 우리는 왜 이 늦은 밤, 당장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졸이는가.

물건을 사는 행위는 현대인에게 일상의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되었다. 온종일 타인의 요구에 시달리고 모니터 앞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견뎌낸 날일수록, 장바구니에 무언가를 담는 순간만큼은 내 세계의 주인이 된 듯한 착각을 안긴다. 결제 승인 알림이 뜨는 순간 우리는 무력한 노동자에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한 구매자로 신분을 바꾼다.

하지만 그 결제창 뒤편에는 우리의 갈증을 영구히 유지하려는 정교한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저작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명료하게 짚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은 사물의 물리적인 쓰임새가 아니다. 물을 담거나 추위를 막아주는 유용성이 아니라, 타인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집단의 유행에서 낙오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기호의 가치를 소비한다.

남들이 다 사서 소셜 미디어 피드에 올리는 컵을 나도 식탁 위에 올려두어야만 뒤처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특정 브랜드의 옷을 걸치고 유행하는 소품을 방에 들이는 일은,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를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기호의 놀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라고 짚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할 때, 그것은 내면에서 저절로 솟아난 순수한 필요가 아니다. 타인이 그것을 욕망하고 있기에, 타인의 시선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빌려온 것에 가깝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그 연약한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검색창에 단 한 번 입력했던 단어를 끈질기게 쫓아와 화면 곳곳에 배치하고, 남들이 이미 손에 쥔 유행을 지금 결제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이라는 불안을 집요하게 부추긴다. 타인의 시선을 빌려 채운 장바구니는 결코 나를 온전하게 채워주지 못한다.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른 이유는, 우리가 산 물건이 방 안의 공간을 차지할 뿐 마음의 진짜 갈증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 시장을 맨발로 거닐던 한 철학자가 있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남긴 전기에는 소크라테스가 이 번잡한 시장을 둘러보며 남긴 인상적인 장면이 전해진다. 당시 아테네의 시장은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건너온 화려한 자주색 비단, 은으로 세공한 포도주 잔, 값비싼 향유와 이국적인 향신료로 가득 차 있었다. 시민들은 저마다 더 값진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상인들과 값을 다투며 아우성을 쳤다.

그 번잡한 난전 한복판을 소크라테스는 낡은 외투 한 벌만을 걸친 채 한참 동안 둘러보았다. 그리고 좌판에 놓인 화려한 상품들을 바라보며 문득 얼굴 가득 밝은 웃음을 띠고는 곁에 선 이들에게 말했다. 세상에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이 늘어서 있구나. 남들이 더 많은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할 때, 그는 그 번쩍이는 물건들이 없어도 자신의 하루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장 한가운데서 확인했다.

소유의 압박을 비워내려는 시선은 20세기 산업 디자인의 현장에서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독일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전후 물질적 풍요 속에서 조잡하고 과장된 조형을 뽐내던 상품들을 보며 근본적인 회의를 품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브라운과 비초에에서 일하며 '좋은 디자인을 위한 열 가지 원칙'을 정리했다. 그중 열 번째 원칙은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하는 것(Less, but better)이다.

그는 제품이 화려한 색채나 불필요한 장식으로 사용자를 유혹하는 것을 엄격하게 경계했다. 물건은 결코 공간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용자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배경으로 물러나 제 몫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물건의 크기와 형태를 깎아내고 군더더기 기능을 덜어낼수록, 물건을 소유한 사람의 방에는 더 많은 호흡과 질서가 깃든다.

아고라 시장을 거닐던 소크라테스의 웃음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 사이에는 분명한 갈림길이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완전한 덕성과 지혜라는 초월적인 목표를 위해 물질적 소유를 덧없는 것으로 밀어냈다. 그는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사계절을 버텼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성자의 삶을 감수했다. 우리는 속세를 등지고 금욕의 길을 걷거나 스마트폰을 쓰레기통에 내던질 수 없는 현대의 생활인이다.

매일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월세를 내며, 필요한 식료품과 생활 도구를 사서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삶이다. 결제창 앞에서 손가락을 멈추는 일은 세속을 등지는 거창한 금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타인의 소비를 맹목적으로 쫓아가지 않음으로써, 피땀 어린 노동의 대가와 일상의 질서를 지켜내려는 구체적인 생존의 선 긋기다.

디터 람스가 제시한 덜어냄의 윤리 역시 소비자에게 도착하는 순간 또 다른 각도로 꺾인다. 디터 람스는 물건을 기획하고 만드는 생산자의 관점에서 비움을 말했다. 반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시각적 자극에 노출되는 소비자의 처지에 서 있다. 생산자가 불필요함을 덜어낸 물건을 빚어내는 것 못지않게, 넘쳐나는 상품의 유혹 앞에서 지갑을 닫고 구매를 멈추는 태도는 온전히 수용자의 몫이다. 물건을 들이는 순간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관리의 수고, 좁아지는 방의 면적, 흩어지는 주의력을 거부하는 일은 소비 사회 한복판에서 일상을 지키는 적극적인 방어선이 된다.

재즈 연주자가 솔로를 펼칠 때, 쏟아낼 수 있는 화려한 음표들을 악기 위에 빽빽하게 채우지 않고 한 마디를 통째로 비워둘 때가 있다. 빠른 속주로 기교를 과시하는 대신, 쉼표를 두고 숨을 고를 때 비로소 앙상블의 호흡이 살아나고 듣는 이의 귀에 긴장감이 전달된다. 비어 있는 공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발적 제약이야말로 소리를 소음에서 음악으로 끌어올린다.

구매 버튼에서 손을 떼는 선택 역시 이와 닮았다. 지금 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재촉하는 알고리즘의 빠른 박자를 거부하고, 하룻밤의 쉼표를 허락하는 태도다.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창가에 닿을 때 어젯밤의 장바구니를 다시 열어보면, 그토록 간절해 보이던 물건들이 실은 없어도 그만인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한 박자 늦추어 숨을 고르는 시간 속에서, 충동과 진짜 쓸모는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내일 문 앞에 도착할 상자는 결코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남들이 다 산다고 해서 내게도 그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손안에 쥐려던 물건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방 안의 고요와 홀가분한 시간이야말로,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단단한 자유다.

출처

  1. 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 (Book II: Socrates, 2.25)Harvard University Press (Loeb Classical Library) / Oxford Classical Texts원전
  2. Ten Principles for Good Design & Dieter Ram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Phaidon Press (Sophie Lovell) / Braun & Vitsoe Archives원전
  3. The Consumer Society: Myths and Structures (La Société de consommation)Éditions Denoël / Sage Publications (Jean Baudrillard)원전
  4. Écrits: A Selection &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Éditions du Seuil / W.W. Norton & Company (Jacques Lacan)원전
  5. Midnight Blue (Blue Note BLP 4123 / BST 84123)Blue Note Records (Kenny Burrell, recorded by Rudy Van Gelder)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