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상 서랍 깊은 곳을 비우다가 오래된 수첩 한 권을 발견한다. 몇 해 동안 한 번도 펼치지 않아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고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다. 아무렇게나 넘기던 종이 틈에서 포스트잇 한 장이 툭 떨어진다. 0.5밀리미터 파란색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짧은 라틴어 문장이 적혀 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통과하고 이제는 소식이 끊긴 사람이 남겨두고 간 글씨다. 책갈피 대신 수첩 틈에 끼워두었던 그 메모를 집어 들자,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저녁의 공기가 불쑥 떠오른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치던 식당 구석, 물잔을 앞에 두고 그 문장의 뜻을 소리 내어 읽어주던 목소리가 있다. 당신이 잘 지낸다면 좋은 일입니다, 나도 잘 지냅니다.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첫머리에 관습처럼 적던 안부 인사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시간이 흐르고 관계는 끝이 났다. 각자의 일상에서 서로의 존재를 덜어내는 과정은 거칠고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소란이 지나간 뒤에도 그 문장만큼은 바랜 종이 틈에 꽂힌 채 살아남아 있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에게 단호해지라고 요구한다. 메신저 대화방을 나가고, 사진첩의 사진들을 지우며, 상대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깨끗이 소거하는 것만이 성숙한 어른의 태도라는 식이다. 관계가 어긋난 뒤 찾아오는 배신감과 허탈함을 방어하기 위해 사람들은 쉽게 상대를 헐뜯거나 깎아내린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몇 년의 시간을 헛된 낭비이자 지워야 할 오점으로 취급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떳떳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헤어진 사람에게서 배운 좋은 습관이나 그가 남겨준 책 한 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주변에서는 아직 과거에 매달려 헤어 나오지 못한다며 혀를 찬다. 깨끗이 끊어내지 못하고 흔적을 품는 태도는 무른 마음의 증거처럼 취급받는다.
하지만 지난 시절을 모조리 지우고 상대를 저주하는 태도는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가? 상처를 핑계 삼아 지나간 시간 전체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나를 아프게 했던 상대의 거친 칼날을 내 손에 쥐게 된다. 그 사람을 미워하기 위해 쏟아붓는 분노는 결국 그 시절을 온 힘을 다해 통과했던 나 자신의 진실함마저 함께 깎아내린다. 사람의 시간은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데이터를 포맷하듯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끝이 모질었을지라도,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낯선 음악과 책,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던 새로운 시선은 이미 내 몸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오래된 인사말이 품은 뜻을 다시 짚었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 서한》 제15편에서 그는 고대인들이 편지를 시작할 때 "당신이 잘 지낸다면 좋은 일입니다. 나도 잘 지냅니다(Si vales bene est, ego valeo)"라고 쓰는 관습이 있었다고 적는다. 라틴어 편지에서 머리글자만 따서 SVBEEV라는 약어로 쓰이던 이 관습구는 단순한 의례적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과연 철학자에게 참으로 "잘 지낸다(valere)"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의 질병이 없는 상태를 넘어, 영혼이 동요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다.
같은 서한집 제63편에서 그는 벗을 잃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향해 중요한 권고를 남긴다. 떠나간 이를 떠올릴 때 눈물과 원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관계가 남긴 선물을 훼손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아꼈다면, 그와 함께 나눈 시간과 대화의 기억은 그가 부재한 뒤에도 내면에 남아 있는 기쁨이자 자산이 되어야 한다. 상실의 아픔을 이유로 지난 기억을 저주하는 일은, 결국 그 시절의 자신마저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1954년 2월 15일, 로스앤젤레스의 캐피톨 멜로즈 스튜디오에서 쳇 베이커는 마이크 앞에 서서 호기 카마이클이 작곡한 노래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을 녹음했다. 피아니스트 러스 프리먼, 베이시스트 카슨 스미스, 드러머 밥 닐과 함께한 이 세션에서 쳇 베이커는 기교를 부리거나 감정을 과장해 터뜨리지 않았다.
그의 보컬과 트럼펫은 비브라토를 극도로 줄인 건조한 스트레이트 톤이었다. 가사는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당신 없이도 난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당신 안부를 물을 때를 빼고는요. 비가 내리거나 봄이 올 때를 빼고는요." 그는 소리 높여 절규하거나 울먹이지 않는다. 상실의 아픔을 지우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는다. 다만 솟구치는 슬픔을 한 박자 늦추어 읊조리며, 비어 있는 쉼표 속으로 음을 나직하게 떨어뜨린다. 부서진 사랑의 잔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비명 대신 부드러운 톤을 골라내는 태도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쳇 베이커의 노래와 로마인들의 옛 편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쳇 베이커의 음악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실의 쓸쓸함과 아릿한 그리움의 그늘에 무게를 두고 머문다. "당신 없이도 잘 지낸다"는 노랫말 뒤에는 끝내 가시지 않는 애잔한 결핍의 고백이 깔려 있다. 반면 세네카가 주목했던 문장, 'Si vales bene est, ego valeo'는 감상적인 탄식에 주저앉지 않는다.
이 문장의 진정한 힘은 두 문장이 이루는 대칭성에 있다. 문장의 앞머리는 상대방을 향한다. "당신이 잘 지낸다면 좋은 일입니다(Si vales bene est)." 그것은 확인하거나 캐묻지 않는 축복이다. 지금 그 사람이 누구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소셜 미디어를 뒤적여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선의만을 건넨 채 한 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문장의 뒷머리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도 잘 지냅니다(ego valeo)." 상대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그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든 없든, 내 삶의 평정과 안녕은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단단한 선언이다. 타인을 향한 축복이 자기희생이나 감정적 의존으로 흐르지 않고, 나를 지탱하는 자립의 기둥으로 곧게 서는 순간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이 지나간 자취를 짚으며 비슷한 진실을 드러냈다. 주인공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하며 겪었던 질투와 상실의 고통 끝에 남은 것은, 그 여인을 소유했다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통과하며 비로소 내면에 새롭게 눈뜬 예술적 감수성과 지각의 언어들이었다. 타인은 떠나고 관계는 부서지더라도, 그 사람 덕분에 내 안에 스며든 새로운 시선과 문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나를 더 넓은 인간으로 빚어낸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이들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상대를 완전히 잊거나 증오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분노로 상대를 지우려 애쓰는 태도는, 실은 그 상대에게 여전히 내 감정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끝이 아팠을지라도 그 사람이 남겨준 좋은 말 하나를 고맙게 품고 살아가는 일은 굴복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남긴 상처의 독기를 내 영혼 안에서 걸러내고, 오직 배움과 선의만을 취해 내 삶의 양분으로 삼겠다는 가장 주체적인 선택이다.
수첩 갈피에서 꺼낸 낡은 포스트잇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는다. 스마트폰을 켜서 옛 번호를 찾아보거나 메시지를 보낼 일은 없다. 이 문장의 힘은 화답을 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대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건네는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나온 관계들이 남긴 크고 작은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어떤 흔적은 뼈아픈 흉터로 남아 있지만, 어떤 흔적은 메마른 일상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나를 스쳐 지나간 인연이 남겨준 따뜻한 식습관, 책을 고르는 안목, 혹은 지친 저녁에 읊조릴 수 있는 좋은 문장 하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품는 일. 그것은 나를 아프게 했던 세상을 닮아가지 않으면서도 내 삶의 품위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가끔 바람이 불고 지나간 시절이 문득 떠오를 때면, 입안에서 이 짧은 라틴어 문장을 천천히 굴려본다.
당신이 잘 지낸다면 좋은 일입니다. 나도 잘 지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출처
- Ad Lucilium Epistulae MoralesOxford Classical Texts / Harvard University Press (Loeb Classical Library)원전
- Cicero in Letters: Epistolary Relations of the Late RepublicOxford University Press (Peter White)
- Chet Baker Sings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Pacific Jazz (PJLP-11 / PJ-1222)원전
- Deep in a Dream: The Long Night of Chet BakerW. W. Norton & Company (James Gavin)
-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ôté de chez Swann & Albertine disparue)Éditions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