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47

다정한 사람은 세상을 모를 리 없다

다 겪고도 거칠어지지 않는 것, 아픔을 지나도 끝내 남겨두는 가장 단단한 선택.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알베르 카뮈 · 루이 암스트롱 · 르상티망
다정한사람

모니터 오른쪽 구석에서 메신저 알림창이 연거푸 붉은 점을 깜빡인다. 스크롤을 내리자 예의를 한 겹 벗겨낸 날카로운 문장들이 화면을 채운다. 마감 일정을 일방적으로 앞당기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상대의 차가운 통보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온다. 자판 위에 얹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탕비실로 걸어가 정수기 레버를 누른다. 차가운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지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기조차 속에서 치솟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자리에 돌아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상대가 쏟아낸 것보다 두 배는 더 날카로운 논리, 상대의 결례를 낱낱이 짚어내며 꼼짝 못 하게 짓누를 모진 반격의 문장들이 입력창을 메운다. 전송 버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놓는다. 상처를 입었으니 나 역시 똑같이 날을 세울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손가락을 재촉한다.

하지만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빼고 멈추어 선다. 얕아진 숨을 길게 내쉬며 모니터를 응시한다. 화면에 가득 찬 공격적인 문장들을 백스페이스 키로 한 글자씩 지워나간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커서가 뒤로 물러나고, 마침내 입력창이 백지로 비워진다. 그리고 몇 초의 여백을 둔 뒤, 완만한 경사를 가진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간다. 무례를 방관하지 않으면서도 가시를 거둔 말,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정돈된 답장을 조심스럽게 전송한다. 화면이 닫히는 순간 묘한 피로와 헛헛함이 밀려온다. 세상은 이토록 모질게 구는데, 왜 나만 번번이 독기를 삼키고 물러서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온통 날카로워지는 법을 가르치는 지침들로 넘쳐난다. 서점의 진열대와 소셜 미디어의 짧은 영상들은 상처받지 않으려면 먼저 단호하게 선을 긋고, 상대의 모난 말에 결코 지지 말고 통쾌하게 쏘아붙이라고 부추긴다. 남을 배려하고 순하게 구는 태도는 무능하거나 무른 사람의 나약함으로 치부되고, 냉정하게 독설을 날리며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이 똑똑한 생존 기술처럼 대접받는다. 상처를 덜 받으려면 먼저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우고 세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아야 한다는 처세술이다.

다정함을 세상 풍파 한번 겪지 않은 이들의 천진함으로 치부하는 시선은 여기서 비롯된다. 험한 꼴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저토록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비열함을 모르니 남에게 너그럽게 굴 수 있는 것이라는 냉소다. 하지만 상처를 이유로 날을 세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이다. 뺨을 맞았을 때 주먹을 쥐고, 모욕을 당했을 때 독설로 갚아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사이자 즉각적인 방어 반응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러한 심리적 퇴행을 '르상티망(원한)'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삶의 조건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힘이 없는 무력한 사람은 자신이 겪은 상처와 피해의식을 도덕적 면죄부 삼아 타인을 악마화한다. 알베르 카뮈가 소설 '전락'에서 해부했던 주인공 클라망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파리의 유능한 변호사였던 그는 자신의 비겁함과 위선이 폭로된 뒤, 암스테르담의 음산한 술집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심판관이라 칭하며 세상 모든 사람의 위선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냉소주의자로 물러앉는다. 상처의 기억을 무기 삼아 남을 찌르고 냉소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인간이 고통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게으른 도피다. 상처를 핑계로 거칠어지는 순간, 우리는 나를 할퀴었던 세상의 모난 모양을 내 안에 고스란히 복제해 들이게 된다.

음악의 역사 속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1967년 8월 16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유나이티드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어선 예순여섯 살의 루이 암스트롱이다.

그해 여름의 미국은 피와 화염으로 얼룩져 있었다. 디트로이트와 뉴어크에서는 대규모 흑인 민권 폭동이 일어나 거리가 불타고 전차와 군대가 투입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의 총성과 최루탄이 도시를 뒤덮었다. 사회는 찢어질 대로 찢겨 있었고, 증오와 분노가 매일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뉴올리언스 최악의 빈민가 제인 앨리에서 태어나 소년원을 거치며 짐 크로우 시대의 살벌한 인종차별과 폭력을 뼈마디 깊숙이 겪어낸 흑인 노장 암스트롱에게도, 세상은 결코 원더풀한 곳이 아니었다.

ABC 레코드의 사장 래리 뉴턴은 암스트롱에게 경쾌하고 신나는 팝 곡을 요구했다. 암스트롱이 느린 템포의 발라드인 'What a Wonderful World'를 부르겠다고 고집하자, 뉴턴은 격분하여 스튜디오 안으로 난입해 고함을 지르며 녹음을 무산시키려 했다. 프로듀서 밥 틸이 그를 스튜디오 밖으로 내몰고 문을 걸어 잠근 뒤에야 소란이 잦아들었다. 마이크 앞에 선 암스트롱은 트럼펫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은 미성이 아니었다. 거친 자갈밭을 굴러온 듯 걸걸하고 투박한 쇳소리였다. 하지만 현악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물결 위로 얹히는 그의 톤은 결코 날카롭게 찌르거나 긁히지 않았다. 모든 음의 모서리를 둥글게 어루만지며 세상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라운드 톤(Round Tone)'이었다. 그는 초록의 나무들과 붉은 장미를 노래하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노래했다.

암스트롱은 훗날 인터뷰와 독백을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젊은이들은 내게 전쟁과 폭동이 가득한 세상이 뭐가 아름답냐고 묻지만, 세상이 나쁜 것이 아니다. 세상에 상처를 입히는 인간들의 행동이 나쁠 뿐이다. 우리가 조금만 서로를 사랑으로 대한다면, 이 세상은 아이들이 자라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의 참상을 몰라서 부르는 유토피아의 동요가 아니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호텔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던 지옥 같은 차별을 온몸으로 통과한 자가, 증오라는 방어벽 뒤로 숨지 않고 끝내 세상에 남겨둔 가장 단단한 다정함의 선언이었다.

피투성이 세상을 다 겪고도 끝끝내 둥근 톤을 잃지 않는 태도는, 알베르 카뮈가 생의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사유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알제리의 극빈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고 청각 장애를 앓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카뮈는, 열일곱 살에 폐결핵 진단을 받아 평생 피를 토하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짊어졌다. 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레지스탕스 투쟁 속에서 세계의 혹독한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그는, 1951년 '반항하는 인간'을 통해 당대 파리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냉소적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적 폭력에 단호히 맞섰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타인을 짓밟거나 증오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반항은 파괴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서로의 취약함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 한계를 긋는 절제의 실천이다.

1953년, 전쟁의 상흔을 지나 오랜만에 고향 알제리의 티파사 유적을 찾은 카뮈는 산문 '티파사로 돌아가다'에서 영원히 기억될 문장 하나를 남긴다. "증오와 폭력의 세계 한가운데서도 나를 지탱한 것은 햇살과 바다에 대한 사랑이었다. 한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굴복하지 않는 여름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캄캄한 겨울 같은 고통을 지나오면서도 그의 내면에 남겨진 것은 날 선 복수심이 아니라 지중해의 따뜻한 빛과 인간을 향한 연민이었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썼던 로맹 가리 역시 세상의 밑바닥을 응시하며 같은 진실에 도달했다. 아우슈비츠의 상처를 안고 죽어가는 유대인 전직 매춘부 로자 아줌마와 아랍인 고아 소년 모모의 서사 속에서, 소설은 집요하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는가. 세상의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다 겪어낸 인물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확인하는 것은, 고통을 핑계 삼아 타인을 찌르는 비열함 대신 끝내 남겨두는 다정함이야말로 인간을 지켜내는 마지막 바닥이라는 사실이었다.

카뮈가 거대한 이념과 역사의 폭력에 맞서 사유의 깃발을 들었고, 암스트롱이 무대의 조명 아래서 상처 입은 시대를 향해 둥근 음을 불어넣었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리는 그보다 훨씬 작고 소박하다. 우리의 일상에는 역사책에 남을 거창한 선언도, 박수를 쳐줄 수천 명의 관객도 없다.

우리가 치르는 싸움은 훨씬 더 미시적이고 은밀한 자리에서 벌어진다.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어깨를 부딪치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타인을 향해 차오르는 욕설을 삼켜내는 일, 일방적으로 마감과 책임을 떠넘기는 메신저 창 앞에서 분노의 문장들을 백스페이스로 지워내며 숨을 고르는 순간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텅 빈 책상 앞일지라도, 나를 할퀴었던 세상의 모난 모양대로 내 영혼마저 비열하게 일그러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톤을 지켜내는 태도다. 상처를 핑계 삼는 현대의 냉소주의자와 다정한 사람 사이의 분기점은 바로 이 자리에서 갈라진다.

냉소주의자는 세상의 험함을 핑계 삼아 스스로 가시를 세우고 남을 찌르는 편안한 길을 택한다. 세상이 모질기 때문에 나도 모질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은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다정한 사람은 상처가 얼마나 살을 에는지 뼈아프게 겪어보았기에, 타인에게 그 아픔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내가 겪은 고통을 이유로 세상에 날을 세우지 않고, 그 뾰족한 칼끝을 내 안에서 녹여 부드러운 여백으로 바꾸어 건네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가 쏟아지는 음표 사이에서 일부러 반 박자 쉼표를 두어 음악의 호흡을 살려내듯, 다정함은 날아오는 공격에 즉각 반사하지 않고 한 템포를 늦추어 삼켜내는 시간의 여백(Timing & Space) 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그 여백은 분노와 냉소라는 익숙한 중력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내적 긴장(Tension)의 산물이다. 다정함은 나약하거나 무른 사람의 굴종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깊이 알면서도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기로 결단한 자만이 벼려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삶의 근육이다.

오늘 밤에도 우리는 피곤한 몸을 싣고 돌아가는 지하철 유리창에서 저마다의 메마른 얼굴을 마주한다.

하루를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날을 세우고 모진 말을 쏟아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상처를 입었으니 뾰족하게 굴어도 된다는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 쉬운 길을 택해 날을 세우는 순간, 우리는 나를 아프게 했던 세상의 모난 모양을 닮아간다.

다정한 사람은 결코 세상을 몰라서 맑은 사람이 아니다. 세상이 얼마나 야박하고 잔인한지,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밑바닥까지 다 겪어낸 사람이다. 다만 그 참상을 다 알고도 자신의 목소리까지 거칠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기로 매 순간 결단하는 사람이다. 상처를 통과하고도 독기를 뿜지 않고 부드러운 톤을 남겨두는 일, 그것은 세상에 대한 순진한 굴복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가장 품위 있는 반항이다.

출처

  1. Noces suivi de L'EteEditions Gallimard (Collection Folio)원전
  2. L'Homme revolteEditions Gallimard원전
  3. What a Wonderful WorldABC Records (45-10982)원전
  4. What a Wonderful World The Magic of Louis Armstrong's Later YearsPantheon Books / Oxford University Press (Ricky Riccardi)
  5. La vie devant soiMercure de France (Emile Ajar / Romain Gary)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