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AFTER HOURS / 01

불이 꺼지고 나서야 시작되는 연주

After the Lights Go Out

낮의 화려한 속주가 멈추고 체력이 바닥난 밤, 우리는 비로소 내 악기 본연의 톤과 마주한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셀로니어스 몽크 · 칼 융 · 침묵과 여백 · 시간
민턴스 플레이하우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외투를 벗어 던지는 순간 방 안에는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는다. 모니터의 푸른빛을 끄고 식탁 스탠드 하나만 켜두면, 낮 동안의 소란스러웠던 세계는 순식간에 저 멀리로 물러난다. 컵 바닥에 남아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숨을 고르는데, 창밖으로 드문드문 지나가는 심야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 낮에 있었던 사소한 장면 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회의실에서 후배가 건넨 사소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굳어지던 표정, 혹은 내 방식을 은근히 방어하려다 쏘아붙이고 만 날카로운 말 한마디다. 상대의 머뭇거리던 눈빛이 뒤늦게 떠오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놀라운 것은 그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투의 억양이, 스물다섯 살 무렵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저렇게 옹졸하게 나이 들지는 말아야지' 하고 경멸해 마지않았던 어떤 옛 선배의 억양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비웃고 밀어내려 했던 기성세대의 낡은 방어기제가, 어느새 내 혀끝에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얹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의 시간 동안, 결핍이나 상처 따위는 앞으로 달려 나가는 발걸음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밤을 새워 일해도 다음 날 아침이면 거뜬히 회복되던 육체적 에너지가 있었고, 세상에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맹렬한 속도가 있었다. 속도가 충분히 빠를 때는 바닥의 자잘한 요철이 바퀴에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내면에 어떤 결함과 열등감이 웅크리고 있든, 하루에 십수 시간씩 일에 몰두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화려한 성과의 볼륨을 최대로 올려두면 그 굉음 아래로 모든 내적 불안은 손쉽게 묻혀버렸다.

하지만 서른일곱이나 서른여덟쯤의 나이에 다다르면, 삶의 계기판에 문득 낯선 경고등이 켜진다. 평생 닳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체력이라는 가장 믿음직한 갑옷이 급격하게 방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몸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정신의 방어벽도 함께 균열을 일으킨다. 속도를 늦추고 브레이크를 밟자마자, 그동안 바쁨과 성취라는 이름으로 억눌러두었던 내면의 결핍과 해묵은 상처들이 통제를 벗어나 수면 위로 삐져나온다. 사소한 비판에도 턱없이 예민해지고, 타인의 성취를 너그럽게 축하하지 못하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편협한 고집을 부리는 자신을 보며 우리는 깊은 당혹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왜 젊은 날의 빛나던 결심은 온데간데없고,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찌질하고 완고한 어른의 모습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일까.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1930년에 발표한 에세이 '인생의 단계(The Stages of Life)'에서 인간의 생애를 태양의 궤적에 빗대어 설명했다. 아침에 떠올라 정오를 향해 치솟는 청년기, 즉 인생의 전반부에는 외부 세계에 적응하고 사회적 성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강력한 자아 의식과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의 인간은 생존과 경쟁에 방해가 되는 나약함, 열등감, 상처받은 감정들을 무의식의 어두운 저장소인 '그림자(Shadow)' 속으로 가차 없이 밀어 넣는다. 젊음의 체력과 야망은 그 그림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거대한 뚜껑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서른다섯에서 마흔 사이, 태양이 정점을 지나 기울기 시작하는 '인생의 정오'에 도달하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다. 신체적 에너지가 쇠퇴하고 자아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오랜 시간 무의식 속에 감금되어 있던 그림자들이 마침내 의식의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융은 이 시기의 위기를 경고하며, 젊은 날 외면했던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정직하게 마주하지 못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더욱 편협하고 독선적인 기성세대의 전형으로 굳어지게 된다고 짚었다.

이와 묘하게 겹쳐지는 풍경이 1941년 미국 뉴욕 할렘의 어느 심야 무대에서도 펼쳐졌다. 118번가에 자리 잡았던 유서 깊은 재즈 클럽 '민턴스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에는 새벽 2시가 넘어가면 손에 악기 케이스를 든 연주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피아니스트 셀로니어스 몽크와 드러머 케니 클라크,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 같은 당대의 젊은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밤새 맨해튼의 화려한 댄스홀과 호텔 클럽에서 백인 청중의 취향에 맞춘 빅밴드 스윙 음악을 연주하고 온 참이었다. 수십 명의 브라스와 리듬 섹션이 뿜어내는 거대한 음량, 완벽하게 정돈된 악보와 매끄러운 편곡 뒤에서는 연주자 개인의 거친 톤이나 사소한 결함이 쉽게 가려졌다. 빅밴드의 화려한 합주는 마치 청년기의 체력처럼 모든 흠집을 감춰주는 안전한 무대였다.

하지만 새벽의 민턴스, 클럽의 셔터가 내려가고 불이 꺼진 뒤(After Hours) 시작된 잼 세션에서 연주자들은 더 이상 상업적인 매끄러움을 흉내 내지 않았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옷을 벗어던지고 오직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의 앙상한 뼈대만 남겨둔 채, 누구도 연주하지 않았던 불협화음과 낯선 반음계, 그리고 각자의 악기가 가진 가장 앙상하고 정직한 날것의 톤으로 새벽의 공간을 채워나갔다. 현대 재즈의 출발점이라 불리는 비밥의 문법은 바로 그 문 닫힌 새벽, 화려한 기교를 벗겨낸 자리에 남은 거친 호흡에서 태어났다.

융의 심리학과 민턴스의 새벽 연주는, 서른 후반의 우리가 매일 밤 마주하는 피로와 결함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의 삶이 수십 대의 악기가 굉음을 뿜어내던 빅밴드의 스윙 무대였다면, 체력이 방전되어 홀로 남겨진 서른 후반의 밤은 우리 삶에서 비로소 문을 연 첫 번째 '애프터 아워즈(After Hours)'다.

낮 동안 세상이 요구하는 유능하고 친절한 사회인의 악보에 맞춰 연주하느라 에너지를 탕진한 우리는, 불 꺼진 방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가식 없는 자신과 마주한다. 그때 거울 속에 비친 지친 얼굴과 낮에 무심코 튀어나왔던 옹졸한 말투는, 내가 무기력하게 타락했다거나 늙어버렸다는 패배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거짓된 속도와 화려한 기교로 자신을 포장할 수 없게 된 한 인간이, 마침내 자기 악기 본연의 '톤(Tone)'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내 안에 튀어나온 옹졸함과 기성세대의 억양을 보며 '나이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거나 '이것도 내 본모습이니 그냥 이렇게 살자'며 무기력하게 체념해 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결핍을 마주하는 정직한 태도가 아니라, 비겁한 합리화이자 나태한 포기일 뿐이다. 재즈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잘못된 음을 짚었을 때, 그 불협화음을 두고 '내 개성이니 상관없다'며 계속해서 엉터리 연주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독창성이 아니라 소음 공해로 끝나는 것과 같다. 융 역시 그림자를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고 방치하면, 그 억압된 그림자가 자아를 완전히 장악해 결국 자신이 가장 증오하던 편협한 괴물로 변해버린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내가 경멸하던 완고한 기성세대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고, 삶의 궤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예방책은 낮의 속주를 밤까지 끌고 오지 않는 '단호한 쉼표(Timing & Space)'의 확보다. 기성세대의 편협함으로 굳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어두는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체력이 바닥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스물다섯 살의 속도와 완벽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에 매달릴 때, 결핍은 무의식의 틈새로 폭주해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공격과 방어기제로 터져 나온다. 낮의 무대가 끝났다면 반드시 커튼을 내리고, 세상의 볼륨을 끈 채 자신의 낡은 체력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정기적인 심야의 여백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불 꺼진 방에서 낮의 내 행동이 잘못된 궤도로 미끄러졌음을 자각했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연주를 시작해야 할 가장 결정적인 타이밍이다.

우선 낡은 핑계와 2차 방어를 멈추어야 한다. '요즘 것들이 예의가 없어서'라거나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비겁한 악보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낮에 굳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던 진짜 이유가 상대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내 무능이나 한계가 들통날까 두려워했던 내 안의 오랜 결핍 때문이었음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일이다.

그다음에는 재즈가 불협화음을 다루는 가장 아름다운 원칙인 '수정과 변주(Risk & Revision)'를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는 일찍이 "잘못된 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음을 연주한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떤 음을 이어 붙이느냐가 그것을 실수로 만들 수도, 위대한 화음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낮에 튀어나온 모난 말투를 부끄러워하며 자책의 수렁에 빠지는 대신, '내가 이 지점에서 불안을 느끼는구나'라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다면,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삐끗했던 음을 디딤돌 삼아 전혀 다른 톤의 멜로디를 시작할 수 있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다가가 어제의 날을 거두거나,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여유로운 앙상블의 호흡(Listen & Respond)을 내딛는 것이다.

서른 후반 이후의 성숙이란, 젊은 날의 스피드를 억지로 흉내 내는 안간힘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내 악기가 가진 흠집과 호흡의 한계를 정확히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기교로 남을 압도하려 들지 않고 단 하나의 음을 짚더라도 깊고 따뜻한 울림을 낼 수 있는 '어른의 톤'을 벼려나가는 일이다.

스탠드의 스위치를 내리고 어둠 속에 눕는다. 방 안은 완전히 캄캄해지고, 창밖에서 멀리 들려오는 희미한 도시의 소음만이 아득하게 맴돈다.

낮 동안 세상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속에서 완벽한 연주자인 척 버티느라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이 스르륵 풀려나간다. 오늘 하루 내 안에서 튀어나왔던 옹졸함과 부끄러운 불협화음들을 억지로 변명하거나 덮어두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삐끗했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보았기에, 내일 아침 우리는 그 불협화음의 자리에 훨씬 더 깊고 유연한 다음 마디의 화음을 얹을 수 있다.

모두가 돌아가고 세상의 불이 꺼진 이 깊은 밤, 당신은 내 안의 서툰 소리를 딛고 내일 어떤 새로운 톤의 연주를 시작하려는가.

출처

  1.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Psyche (Collected Works Vol. 8)Princeton University Press / Routledge원전
  2. Man and His SymbolsDoubleday / Dell Publishing원전
  3. Shadow and ActRandom House / Vintage Books원전
  4. Harlem Jazz Scene - 1941 / Midnight at Minton'sEsoteric Records / Storyville Records원전
  5. Miles (The Autobiography)Simon & Schuster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