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22
매일 같은 시간에 앉는 사람의 자유
The Freedom of Sitting at the Same Time
감정의 변덕에 기대지 않고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는 일은 자아를 메마르게 하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단단한 리듬이다.

아직 창밖의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4시 반, 방 안에는 낮 동안 흩어져 있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낡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스위치를 누르면, 바닥에서부터 나지막하게 끓어오르는 기포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조심스럽게 가른다. 보온 머그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고 김을 후후 불며 책상 앞에 다가앉는다.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모니터의 전원을 켜면, 푸른빛 속에서 깜빡이는 빈 화면의 커서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창밖 골목길에는 지나가는 차도, 길을 걷는 사람의 발소리도 없다. 어떤 극적인 계기나 거창한 결심도 없이, 그저 어제 앉았던 바로 그 시간에 같은 자세로 책상 앞에 앉는 일. 하루의 첫 번째 노동은 언제나 이 무심하고 소박한 반복에서 시작된다.
세상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를 지키는 이 지루한 반복을 두고 언제나 극단적인 두 갈래의 시선을 보낸다.
한편에서는 이를 시간을 빈틈없이 통제하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완벽한 무기로 칭송한다. 일 분 일 초를 쪼개어 체크리스트를 지워 나가고, 새벽잠을 줄여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식의 훈계가 넘쳐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규칙적인 삶을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기계적 순응이자 상상력을 거세하는 굴레로 경멸한다. 진정한 예술가나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모름지기 감정의 격랑과 밤의 취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즉흥적인 충동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환상이다. 규칙적인 일과는 자발성을 죽이고, 충동적인 방종만이 날것의 진실을 낳는다는 이분법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책상에 앉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번뜩이는 영감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다짐은 대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게으름의 다른 이름이고, 시간표를 빼곡하게 채우며 자기를 몰아붙이는 일은 그저 내면의 막막한 불안을 가리기 위한 안간힘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감에만 기대어 살기에는 인간의 감정이란 너무나 변덕스럽고, 스스로를 옥죄는 규율에만 매이기에는 삶의 에너지가 금세 소진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는가. 이 반복되는 동작은 우리를 쳇바퀴에 가두는 감옥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자유로 나아가게 하는 문인가.
1982년, 서른셋의 나이에 자신이 7년간 운영하던 도쿄의 작은 재즈 바를 정리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묵직한 대답을 품고 있다.

하루키는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거의 동일한 일과를 유지해 왔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간에서 6시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쓴다. 그가 하루에 쓰는 분량은 400자 원고지 기준으로 매일 정확히 10매, 글자 수로는 약 4천 자 안팎이다. 글이 유난히 술술 풀려 20매를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날에도 그는 정확히 10매에서 키보드를 멈춘다. 반대로 문장이 도무지 풀리지 않아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하는 날에도, 그는 억지로 책상에 버티고 앉아 어떻게든 10매의 분량을 채워 넣는다. 오후가 되면 10킬로미터를 달리거나 수영을 하고, 저녁에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든다.
하루키에게 이 철저한 반복은 더 많은 결과물을 쏟아내기 위한 욕망의 발로가 아니다. 그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인간 무의식의 깊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에 비유했다. 인간의 심연 바닥에는 삶을 뒤흔드는 위험하고 매혹적인 어둠의 독성 물질이 고여 있다. 신체적 지구력과 정밀한 일상의 방어벽 없이 그 어두운 심연으로 무작정 내려갔다가는, 자아의 중심을 잃고 영원히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내면의 독성에 중독되어 파멸하고 만다.
재즈 바를 운영하며 매일 밤 무대 위의 연주를 지켜보았던 그는 글쓰기의 본질을 음악의 '리듬'으로 파악했다. 매일 새벽 정해진 시간에 앉아 정확히 10매만을 쓴다는 엄격한 제약은, 신체에 일정한 최면을 걸어 자아의 잡다한 의심과 게으름을 잠재우는 장치다. 이 단단한 리듬이 바닥을 받쳐주고 있기에, 작가는 영감의 유무나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지 않고 매일 안전하게 심연으로 내려가 낯선 이야기를 건져 올린 뒤 온전한 제정신으로 햇빛 아래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동작을 매일 반복한다고 해서, 그 반복이 가리키는 목적지까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한편에는 일본의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가 있다. 이치로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배트를 세우는 특유의 예비 동작부터 경기 전 식사 메뉴, 라커룸에서 글러브를 닦는 순서에 이르기까지 1초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동작을 수십 년간 반복했다. 이치로의 루틴은 상대 투수의 구위나 구장의 소음 같은 외부의 불확실한 소음을 지우고, 자기 신체의 미세한 영점 변화를 감지해 내기 위한 정밀한 계측 장치였다. 외부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오차 없는 기계로 만드는 반복이다.
반대편에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가 서 있다. 부코스키는 규칙적인 일과나 안락한 책상을 창작자의 야성을 거세하는 부르주아적 억압으로 격렬하게 경멸했다. 그는 책상머리의 규율 대신 만취와 숙취, 헐값의 육체노동과 삶의 밑바닥에서 벌어지는 무질서한 파탄에 온몸을 내던졌고, 억지로 노력하지 말고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터져 나올 때만 써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하루키의 반복은 이치로의 기계적 통제와도 다르고, 부코스키의 파괴적 방종과도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다. 하루키의 루틴은 자아를 규격화하기 위한 통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경직된 방어벽을 풀고 무의식의 즉흥적인 소리를 안전하게 길어 올리기 위한 비계'다.
재즈 앙상블을 떠올려보면 이 역설은 더욱 선명해진다. 무대 위에서 베이스 연주자가 매 마디마다 흔들림 없이 4분음표의 묵직한 워킹 베이스를 짚어주고 드러머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라이드 심벌의 박자를 쪼개어줄 때, 색소폰 연주자는 비로소 박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가장 과감하고 아슬아슬한 즉흥 솔로를 펼칠 수 있다. 리듬 섹션이 만들어내는 단단한 제약이 없다면, 솔로 연주자의 즉흥은 자유로운 비상이 아니라 그저 방향을 잃고 흩어지는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지키는 반복은, 나를 옥죄는 감옥이 아니라 삶이라는 즉흥 연주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바닥을 짚어주는 가장 든든한 리듬 섹션이다.
다시 새벽의 책상 앞. 스탠드의 노란 불빛 아래로 시계 초침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요를 가르고, 찻잔에서는 엷은 김이 조용히 피어오른다.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같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침묵의 시간은, 세상을 향해 대단한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분투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어제의 피로나 오늘의 불안,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감정의 소음 속에서도 나라는 악기가 오늘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톤을 조율하는 자리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유난히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날, 우리는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지키고 있는 그 작은 반복은 당신을 가두는 차가운 쇠창살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삶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뛰어내릴 수 있도록 뒤를 받쳐주는 가장 단단한 바닥입니까.
출처
-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Alfred A. Knopf / Vintage Books원전
- Novelist as a VocationAlfred A. Knopf / Switch Publishing원전
- Haruki Murakami, The Art of Fiction No. 182The Paris Review원전
- The Meaning of IchiroWarner Books원전
-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Black Sparrow Press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