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23

아무 일도 없는 날의 해상도

The Resolution of an Ordinary Day

사는 재미는 거대한 이벤트나 자극을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눈앞의 사소한 디테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 일상은 비로소 나만의 연주가 된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시몬 베유 · 브라이언 이노 · 주의 집중과 감각
퇴근길 버스 안에서 바라본 노을

늦은 밤, 어두워진 방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무심하게 밀어 올린다. 짧은 영상 몇 편과 단편적인 문장들이 푸른빛 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피드에는 유독 '요즘 통 사는 낙이 없다'거나 '도대체 다들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는 짧은 탄식들이 자주 눈에 띈다.

출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 퇴근 후 형광등 아래에서 대충 차려 먹는 저녁 식사, 주말 오후의 텅 빈 방. 우리는 종종 특별한 사건이나 강렬한 자극이 없는 평범한 날들을 어딘가 비어 있거나 실패해 버린 '미완성의 하루'로 채점하곤 한다. 세상은 더 강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나라고 부추기지만, 화면을 닫고 침대에 누웠을 때 찾아오는 공허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왜 '사는 낙'이라는 것을 항상 외부에서 배달되어야 하는 거대한 선물처럼 상상하는 것일까.

복권 당첨이나 먼 곳으로의 여행, 뜻밖의 행운처럼 삶의 지루함을 한 방에 날려줄 마법 같은 자극을 기다리는 일은 꽤나 익숙한 습관이다. 하지만 외부의 강한 자극에 기댄 재미는 위험한 대가를 요구한다. 더 자극적인 숏폼을 찾아 화면을 넘길수록 감각의 역치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스크롤을 멈춘 뒤 마주하는 방 안의 적막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시시하고 참담하게 느껴진다.

권태의 진짜 원인은 대상의 부족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고 만지는 우리 감각의 해상도가 뭉개진 데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아무런 음악도 들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주변의 나지막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주의 집중(Attention)'에 관해 글을 쓰며, 그것이 무언가를 악착같이 움켜쥐려는 의지의 힘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베유에게 진정한 주의 집중이란 내 안의 선입견과 욕망, 거창한 기대를 비우고 눈앞에 놓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들어오게 만드는 수용의 태도였다.

베유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철학자였지만, 관념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1934년 르노 자동차 공장에 들어가 프레스 기계를 다루는 고된 육체노동을 자처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쇳덩이의 촉감과 기름 냄새, 귓전을 때리는 기계음 같은 구체적인 현실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사회적 중력과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거대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눈앞의 사소한 실재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 베유가 발견한 구원의 방식이었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2000년 다큐멘터리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남들이 지나쳐버린 사소한 파편들을 주워 모으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확이 끝난 밭에서 상품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버려진 울퉁불퉁한 하트 모양의 감자, 바늘이 떨어져 나가 더 이상 시간을 가리키지 못하는 낡은 벽시계를 주워 들며 바르다는 유쾌하게 웃는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사소한 사물들에 시선을 멈추고 고유한 표정을 발견하는 일. 바르다에게 이삭 줍기는 단순한 쓰레기 수집이 아니라,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생명력과 유머를 길어 올리는 시적인 놀이였다.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는 1975년 교통사고로 병실에 누워 있던 어느 비 오는 날, 전혀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친구가 틀어주고 간 18세기 하프 연주 음반이 스피커 한쪽의 고장으로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창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노는 음악 소리를 억지로 키우는 대신 귀를 조용히 쫑긋 세웠다. 그러자 희미한 하프 선율이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자연스럽게 섞여 들며 방 안의 공기 자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음향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8년 《Ambient 1: Music for Airports》를 발표하며 앰비언트 음악을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끝없는 디테일이 들려오는 음악'으로 정의했다. 청자를 압도하는 강한 비트나 화려한 멜로디 대신, 은은한 배경의 울림과 공간의 여백에 귀를 기울일 때 음악은 비로소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1961년 뉴욕의 작은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에서 녹음된 빌 에반스 트리오의 연주에서도 이와 같은 청취의 마법이 일어난다.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의 섬세한 인터플레이 사이로 관객들의 와인잔 부딪치는 소리와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섞여 들어간다. 그것은 연주를 방해하는 소음이 아니라, 그날 그 공간의 공기를 온전하게 완성하는 가장 생생한 배음이 되었다.

사소한 디테일에 온전히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세 사람의 태도는 닮아 있지만, 그들이 도달한 풍경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향한다.

시몬 베유의 주의 집중이 고통을 직면하고 자아를 내려놓는 고요한 헌신으로 나아갔다면, 아녜스 바르다는 버려진 파편들을 엮어 유쾌한 영화를 완성하는 예술적 채집으로 나아갔고, 브라이언 이노는 새로운 청취의 음향 건축을 설계하는 프로듀서의 자리에 섰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는 고행을 자처하는 성자가 될 필요도, 영화를 찍거나 새로운 음악 장르를 발명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는 재미'라는 것을 거대한 외부의 자극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내 감각의 해상도를 1픽셀 높여 눈앞의 사소한 디테일을 능동적으로 연주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입안에 감도는 쌉싸름한 산미의 층위, 퇴근길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의 그라데이션,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 바람의 결. 화려한 속주로 무대를 장악하지 않아도 건반을 누르는 타건의 깊이와 여백만으로 청중을 숨죽이게 만드는 피아니스트처럼, 삶의 재미는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감지하는 지각의 감도에 달려 있다.

배경 소음이라 여겼던 빗소리를 음악으로 바꾸어 듣는 앰비언트의 귀를 가질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밋밋한 하루는 지루한 실패가 아니라 가장 섬세한 결을 지닌 나만의 연주 공간으로 변모한다.

특별한 사건도, 설레는 도파민도 없었다고 해서 오늘 하루가 무의미하게 메마른 것은 아니다.

앰비언트 음악처럼 조용히 흘러간 시간의 배경 속에서, 당신이 오늘 신경을 곤두세워 알아챈 미세한 소리와 온도는 무엇이었는가.

사는 낙을 찾아 끝없이 피드를 헤매는 우리에게, 삶은 이미 눈앞의 사소한 디테일 속에서 가장 정직하고 째지한 리듬으로 대답하고 있다.

출처

  1. Waiting for God (Attente de Dieu)Harper Perennial원전
  2. Gravity and Grace (La Pesanteur et la Grâce)Routledge원전
  3. Les Glaneurs et la glaneuse (The Gleaners and I)Ciné-Tamaris / The Criterion Collection원전
  4. Ambient 1: Music for Airports (Original Liner Notes)EG Records / Virgin Records원전
  5. A Year with Swollen AppendicesFaber & Faber원전
  6. The Scent of Time: A Philosophical Essay on the Art of LingeringPol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