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늦은 오후,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다 스레드(Threads)에 올라온 몇 줄의 글 앞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답례로 나눠준 조그마한 꽃다발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적어 내려간 일화였다.
가방을 멘 채 버스를 기다리던 그의 곁으로 백발의 노인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정류장의 소음을 거스르지 않는 낮고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아가씨, 혹시 그 꽃 버릴 거면 나 주면 안 될까?"
당황해하는 글쓴이의 표정을 살피며, 노인은 변명이나 재촉 대신 지나가는 바람 이야기라도 하듯 짤막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늙어서 꽃다발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장미를 참 좋아하거든."
글쓴이는 그 일화의 끝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 꽃다발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고백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그 꽃은 예식을 축하하러 발걸음을 한 하객의 손에 돌아간 정당한 답례품이었고,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의심할 여지 없는 온전한 제 몫이었다. 집으로 가져가 책상 위 유리컵에 꽂아두면 며칠간 방 안을 밝혀줄 소소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장미를 참 좋아하거든"이라는 노인의 말이 가닿는 순간, 손에 들린 꽃다발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말에는 남의 것을 탐내는 기색도, 동정을 바라는 과장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 더는 누구도 꽃을 건네지 않는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장미를 향한 애정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목소리였을 뿐이다.
글쓴이는 그 짧은 틈에서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에게 이 꽃은 며칠간 방 안을 장식하다 시들면 버려질 사소한 덤이지만, 저 노인에게는 어쩌면 이번 계절에 유일하게 품에 안아볼 장미라는 사실을. 정당한 내 몫이라는 권리를 고집하는 대신, 사물이 더 절실하게 숨 쉴 수 있는 사람에게 손을 열어준 셈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 삶의 풍경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내 손에 먼저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내 것'이라 믿고 완강하게 움켜쥐는가. 카페의 빈 테이블, 회의실의 발언권, 지하철의 빈자리, 심지어 우연히 내 손에 쥐여진 작은 호의나 권리들 앞에서도 우리는 늘 '내 차례'라는 깃발을 꽂는다. 내가 먼저 쥐었으니 내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헐벗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만을 향해 돌진하던 이기적인 삶의 관성이 멈춰 선다고 보았다. 타자의 결핍과 호소에 응답하는 일이야말로 존재의 성채를 허물고 인간을 윤리적이게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내 입으로 들어가려던 빵 한 조각을 굶주린 이에게 건네듯, 내 손에 쥐여 있던 물건이 나보다 저 사람의 하루에서 훨씬 더 절실하게 쓰일 수 있음을 알아채는 자리다.
재즈 앙상블에서 베이스는 앞으로 나서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음악의 중심을 잡는다. 화려한 솔로로 시선을 모으는 대신, 다른 악기가 안심하고 제 음을 낼 수 있도록 넓은 품을 열어두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1987년 11월, 로마의 C.M.C. 스튜디오에서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은 트럼페터 쳇 베이커와 마주 앉았다. 앨범 'Silence'를 녹음하던 자리였다. 베이커가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창문 아래로 추락해 세상을 떠나기 불과 6개월 전이었다.
당시의 쳇 베이커는 젊은 날의 수려한 외모와 날렵한 주법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랜 약물 중독과 거리에서의 폭행으로 앞니가 부러져 마우스피스를 대는 입술조차 성치 않았다. 유럽의 값싼 여관과 기차역 주변을 맴돌며 간신히 악기를 불던 시기였고, 사람들은 그를 흘러간 중독자로 취급했다. 그에게 기대를 걸거나 무대를 선뜻 내어주는 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리버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찰리 헤이든은 베이커의 무너진 외양 아래 여전히 살아 있는 서정적인 음색을 기억하고 있었다. 타이틀곡 'Silence'에서 베이커의 호흡은 짧고 얕다. 폐활량이 부족해 긴 프레이즈를 잇지 못하고, 마우스피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트럼펫 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얇게 흔들린다.
이때 헤이든의 더블베이스는 그 빈자리를 틈타 화려한 기교를 펼치거나 볼륨을 높이지 않는다. 그는 베이커의 위태로운 호흡 아래로 낮게 내려앉아,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을 넓게 유지한 채 굵직한 저음을 단단하게 짚는다. 쳇 베이커가 남은 숨을 쥐어짜 자신의 소리를 끝까지 낼 수 있도록, 마이크의 중심을 차지하는 대신 한 박자 뒤에서 묵직하게 받쳐주는 것이다. 훗날 헤이든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쳇과 연주할 때 나는 내가 베이스 주자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나는 그저 그가 연주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그물을 쳐주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아인 랜드의 엄격한 시선은 이 지점에서 단호한 반론을 던질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노력이나 우연한 행운으로 정당하게 획득한 몫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성적 삶의 본질이며, 타인의 결핍 앞에서 감상에 젖어 제 몫을 양보하는 것은 자아를 갉아먹는 비합리적 희생이라고 말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랜드의 냉정한 충고에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내게 주어진 몫을 순순히 넘겨주는 순간, 우리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거나 손해를 보았다는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류장에서 꽃다발을 건넨 사람의 마음은 결코 자아의 패배나 굴복이 아니었다. 빼앗겼다는 억울함 대신, 무언가를 쥐고 있을 때 온몸에 들어가 있던 불필요한 긴장이 탁 풀려나가는 가벼움에 가깝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향한 책임을 주체를 인질로 잡는 무한한 빚이자 엄숙한 윤리적 명령으로 밀어 올렸다. 하지만 생활인이 정류장에서 손을 펴는 순간은 그런 비장한 도덕과 거리가 멀다. 거창한 윤리적 부채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장미를 참 좋아하거든"이라는 상대의 소박하고 맑은 마음에 문득 가닿았을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양보에 가깝다.
자크 데리다는 주는 자가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는 순간 보답의 경제나 도덕적 우월감이 개입하므로 순수한 선물이란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짚었다. 그러나 '주인이 내가 아니었음'을 알아채는 순간에는 주는 자의 우월감이나 보답을 바라는 셈법 자체가 설 자리를 잃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물건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손을 열어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꽃다발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연히 내 손을 거쳐 간 선물로 되돌아간다.
찰리 헤이든이 쳇 베이커의 불안한 음 아래 베이스의 그물을 펼쳐주었듯, 손을 펴는 일은 내 몫을 억지로 떼어주는 희생이 아니다. 사물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알아보고,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쥐고 있던 손을 풀어주는 일이다.
스레드의 짧은 글을 읽고 나서 스마트폰 화면을 덮는다. 창밖에서는 둔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버스 한 대가 정류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손에 장미 꽃다발을 안고 돌아섰을 노인의 뒷모습과, 빈손으로 버스에 올라탔을 글쓴이의 가벼워진 손끝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쥐고 있던 것을 떠나보낸 자리에 남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뜻밖의 홀가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 손에 쥐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완강하게 움켜쥐고 있었을까. 내가 먼저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 회의실에서 내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던 오기, 내 차례라는 권리, 내 몫이라는 팽팽한 계산.
나보다 그것을 더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쥐고 있던 손을 선뜻 펼 수 있을까.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자유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주머니 속 빈손의 여백으로 스며든다.
출처
- Silence - Charlie Haden with Chet Baker, Enrico Pieranunzi, Billy Higgins (Soul Note, SN 1172)Soul Note원전
-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Martinus Nijhoff / 민음사원전
- Éthique et InfiniFayard / 다산글방원전
- The Virtue of Selfishness: A New Concept of EgoismSignet원전
- Donner le temps. 1. La fausse monnaieÉditions Galilée원전
- The Penguin Guide to Jazz on CD (6th Edition - Entry: Charlie Haden / Chet Baker)Penguin Books
- Charlie Haden: In Pursuit of the Beautiful Note (JazzTimes Interview Archive)JazzTimes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