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43
살아라, 그대는... 그 뭐냐... 그거다
Live, You Are... That
살아야 할 거창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밤. 고장 난 수식어 뒤에 남겨진 가장 단순한 생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불을 끈 방,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을 무심코 넘기다 한 장의 이미지 앞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유명한 포스터 문구를 패러디한 낡은 짤방이었다.
원래 그 자리는 웅장한 선언이 차지해야 할 곳이었다. 상처투성이 얼굴로 숲을 지키려던 소녀를 향해 소년 아시타카가 던졌던 영화의 핵심 대사,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그런데 화면 속 글자는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턱 걸려 있었다.
'살아라, 그대는... 그 뭐냐... 그거다.'
'아름답다'는 눈부신 형용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덜컥 생겨난 말문 막힘의 틈새. 번지르르한 수식어를 찾지 못해 '그 뭐냐... 그거'로 얼버무려진 이 우스꽝스러운 말실수 앞에서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머쓱한 문장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멋진 이유를 대지 못해 말을 더듬거리는 그 헐렁한 빈틈이,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웅크린 우리 자신의 실루엣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말문이 턱 막히는 순간을 마주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건네는 무심한 물음 앞에서도 그렇다. "너 요즘은 무슨 재미로 사냐?" 혹은 "앞으로 무슨 계획으로 살려고 그래?"
그럴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혀가 굳어버린다. 주말마다 몰두하는 멋들어진 취미나 인생의 확고한 목표 같은 것을 막힘없이 꺼내놓아야 할 것만 같은 무언의 압박감 때문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대답은 기껏해야 "어... 그냥... 뭐... 살지" 같은 맥 빠진 웅얼거림뿐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대라고 다그친다. 번듯한 명함부터 서점 매대에 꽂힌 수많은 지침서까지, 모든 것이 삶의 명분과 확실한 목적을 끊임없이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무엇을 위해 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분명한 쓸모를 설명하지 못하면 어딘가 결함이 있거나 나태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다.
영화 속 영웅처럼 가슴을 펴고 "그대는 아름답다!"고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 뚜껑을 뜯거나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아름답다'거나 '특별하다'는 수식어로 매끄럽게 포장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미지근한 보리차를 마시는 생활인일 뿐이다.
그런데 이 엉뚱한 밈 속 문장은 곱씹을수록 묘한 구석이 있다. '아름답다'는 화려한 수식어가 고장 나고 '그 뭐냐 그거'로 덜컹거렸는데도, 맨 앞의 '살아라'라는 명령만큼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끝까지 남았기 때문이다. 수식어가 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도 삶의 명령은 취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토록 삶의 이유를 대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여전히 숨을 쉬며 오늘 하루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1945년 파리의 강연장에서 매우 단순한 물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로 편지를 뜯는 종이칼이었다.
장인이 종이칼이나 가위를 만들 때는 먼저 그것의 쓸모와 목적을 생각한다. 종이를 반듯하게 자른다는 명확한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있고 나서야 칼이라는 사물이 비로소 만들어진다. 만약 종이칼이 종이를 자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망가진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은 그런 도구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사용설명서 같은 본질이 없다. 우리는 어떤 뚜렷한 쓸모나 이유를 가지고 공장에서 찍혀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명분 없이 이 세계에 그저 불쑥 내던져져 먼저 존재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선언은 바로 이 뼈아픈 자유를 가리킨다.
그러니 "너는 왜 사느냐"는 질문에 혀가 굳고 말문이 막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애초에 쓰임새가 먼저 정해진 연필이나 가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를 대지 못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사용설명서 없이 세상에 덜컥 내던져진 존재라는 당연한 생리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이 언어의 한계를 누구보다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사람이다. 거창한 웅변과 번지르르한 수식어를 혐오했던 그는, 언어가 파탄 나고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폐허의 바닥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발걸음을 떼는지 관찰했다.
1953년 발표한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말할 수 없어, 말해야 해. 갈 수 없어, 갈 거야."
베케트의 인물들은 대단한 희망이나 삶의 숭고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잇지 못해 더듬거리고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는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그들은 그저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한다. 거창한 수식어가 산산조각 난 자리에서도 한 걸음을 옮기고 숨을 들이쉬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같은 사실을 두고, 철학자들의 표정은 엉뚱할 만큼 비장해지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본질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 그 빈자리를 감당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위대한 본질을 창조해내야 한다며 멱살을 잡았다. 본질이 없으니 너의 모든 행동에 전 인류적인 책임을 지라는 그의 요구는, 자유라는 이름의 또 다른 무거운 형벌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비장했다. 그는 삶에 신적인 이유나 객관적 의미가 없다는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산꼭대기로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눈을 부릅뜨고 반항하라고 말했다.
타임라인을 채우는 비명 같은 물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데 왜 계속 살아가야 하지?'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카뮈를 떠올리며 이렇게 응수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부조리에 굴복하기 싫어서, 순순히 져주기 싫어서 반항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어차피 살아가야 한다면 고통을 곱씹기보다는 차라리 뻔뻔하게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보잘것없는 내가 이 가혹한 세상에 통쾌하게 엿을 먹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이보다 짜릿한 실존적 반항이 또 있을까. 세상이 던져주는 고통에 무릎 꿇는 대신, 보란 듯이 행복하게 버텨내어 세상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결의다.
그러나 솔직해져 보자. 어떤 날에는 세상에 엿을 먹이겠다는 그 팽팽한 반항심마저도 너무 무겁고 뜨겁게 느껴진다. 바위를 밀어 올리며 이를 악무는 것조차 기운이 달리는 퇴근길이 있다. 우리는 신화 속의 비극적 영웅도 아니고, 전 인류의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사상가도 아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울릴 알람 시계를 걱정하며 웅크려 누운 보통 사람이다.
매 순간 위대한 본질을 창조하라는 사르트르의 훈수도, 세상에 한 방 먹이기 위해 보란 듯이 행복해야 한다는 반항의 비장미도, 하루치 노동에 지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피로한 숙제처럼 다가온다. 베케트마저도 언어의 무능 앞에서 극한의 침묵 속으로 무겁게 침잠해 들어가지 않았던가.
'살아라, 그대는... 그 뭐냐... 그거다'라는 문장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짤방의 위트는,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과 세상과 싸워 이기겠다는 거창한 결의마저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뭐냐... 일단 자자" 하고 피식 웃으며 넘겨버리는 능청스러운 무심함에 있다.
우리는 나를 대단하게 입증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거창한 복수를 하기 위해 억지로 행복을 꾸며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거창한 명분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오늘 하루를 숨 쉴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대 중국의 장자는 도끼에 찍히지 않고 산속에서 천수를 누리는 뒤틀린 거목을 보며 무용지용을 말했다. 목재로서의 쓸모가 없었기에 나무는 베어지지 않고 오롯이 자기 생명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쓸모와 목적의 잣대를 내려놓을 때, 존재는 비로소 비정한 계산으로부터 풀려난다.
"그 뭐냐... 그거다"라는 머쓱한 얼버무림은 무능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쉼 없이 강요하는 의미 과잉의 피로로부터 내 숨통을 지켜내기 위해 슬쩍 쳐두는 얇은 방패막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름답다'는 빛나는 수식어를 끝내 얻지 못한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수식어가 다 떨어져 나가도, 말이 덜컹거리며 멈추어도, 심장은 뛰고 폐는 조용히 공기를 들이마신다. 실존은 언제나 그럴싸한 이유보다 앞서며, 숨을 쉬고 밥을 챙겨 먹는 일은 세상의 허락이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밤 누군가 당신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냐"고 묻는다면, 더는 당황하여 멋진 포장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그저 어깨를 한번 가볍게 으쓱해 보이며 이렇게 대답해도 충분하다.
"그냥... 그 뭐냐... 그거다."
출처
- L'Innommable (The Unnamable)Les Éditions de Minuit원전
-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Éditions Nagel / Gallimard원전
- Le Mythe de Sisyphe: essai sur l'absurdeGallimard원전
- Damned to Fame: The Life of Samuel BeckettSimon & Schuster / Bloomsbury
- もののけ姫 (Princess Mononoke) 극장 카피 및 기획 사료Studio Ghibli / 徳間書店원전
- 莊子 (장자) 내편 〈인간세(人間世)〉 및 〈소요유(逍遙遊)〉Chinese Text Project / 전통문화연구회원전
- Genius of Modern Music: Volume 1 - Thelonious Monk (Blue Note, BLP 1510)Blue Note Records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