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44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

Right Then, Wrong Now

늦은 밤 문득 떠오르는 지난날의 낯뜨거운 기억 앞에서. 서툴렀던 건반을 지우는 대신 다음 마디의 화음으로 품어 안는 일.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실수 · 즉흥
뒤를 돌아봐

오래된 서랍 속이나 클라우드 사진첩의 깊은 폴더를 정리하다가, 몇 년 전 내가 썼던 글이나 작업물, 혹은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메시지 창을 우연히 열어보게 되는 밤이 있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목덜미가 달아오르며 손가락 끝이 굳는다.

어쩜 이렇게 낯뜨겁고 유치했을까. 왜 저런 자리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저토록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며, 왜 저토록 앙상한 논리를 대단한 진리인 양 우겨댔을까. 불과 몇 년 전의 내 모습인데도, 지금의 내 눈에는 철모르는 어린애의 치기나 꼴불견처럼 비친다. 화면을 끄고 방의 불을 내려보아도, 어둠 속에서 활자로 박힌 몇 줄의 문장이 가라앉지 않고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는 누구나 지난날의 나를 마주할 때 비슷한 당혹을 겪는다. 20대에 작성했던 엉성한 이력서, 서툰 감정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던 지난 연애의 메시지, 혹은 의욕만 앞서 엉망으로 꼬아놓았던 프로젝트의 코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절을 없던 일로 만들거나, 영원히 묻어둘 실수처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으려 애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다. 우리는 왜 과거의 나를 대할 때 유독 가장 냉담한 심판관이라도 된 듯 굴게 되는 것일까.

과거의 선택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진짜 이유는, 지금의 내가 그 시절보다 너무 많은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 뒤늦게 읽은 책들, 사람들과 부딪히며 깨달은 요령들이 이미 내 손안에 쥐여 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결과를 손에 쥔 뒤에야 비로소 과거를 돌아보며 '애초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믿어버리는 사후확신 편향이라 부른다.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막막한 시공간에, 현재의 풍족한 지식과 뒤늦은 여유를 무람없이 덧씌운다. 그리고는 너는 왜 그때 그렇게 어리석었느냐며 지난날의 나를 탓한다. 그것은 공정한 평가라기보다, 시간이 선물한 사후적 우월감을 앞세워 아무런 방패도 없던 과거의 자아를 일방적으로 추궁하는 행위에 가깝다.

현재의 기억과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는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가 대중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까닭 역시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짜릿한 성공담을 즐기려는 호기심을 넘어, 지금 알고 있는 지식과 요령을 쥔 채 서툴렀던 과거로 돌아가 지난날의 부끄러운 실수와 결핍을 깨끗이 바로잡고 싶다는 간절한 보상 심리의 투영이다. 인생 2회차의 주인공이 되어 모든 오답을 단숨에 지워버리고, 미숙했던 과거의 나를 전지전능한 현재의 나로 말끔하게 덮어쓰고 싶은 환상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는 2회차를 시작하는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르며, 우리는 미래의 공략집을 품에 안은 채 과거를 다시 쓸 수 없다. 지난 시절을 성급하게 깎아내리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분별력 있고 훌륭하다는 은밀한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 과거의 나를 매정하게 비웃음으로써 현재의 성숙함을 입증하려 애쓰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나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은 허공에 울려 퍼져버린 소리처럼 되감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허공에 흩어져 버린 그 서투른 마디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악보가 없는 재즈의 즉흥 연주는 바로 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성질 위에서 출발한다. 정해진 악보를 오차 없이 재현하는 고전 음악의 무대에서, 건반을 헛짚는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이자 지워야 할 흠집이다. 그곳에서 잘못 짚은 음은 연주의 완성도를 깎아먹는 명백한 오답에 불과하다. 하지만 악보도 없이 매 순간 새로운 선율을 밀어 올려야 하는 즉흥 연주의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법칙이 작동한다. 무대 위로 한 번 튀어나온 불협화음은 결코 취소하거나 지워버릴 수 없다. 이미 울려 퍼진 소리를 붙잡고 한탄하거나 연주를 멈춰버리는 순간 무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방금 손끝에서 튀어나온 그 어색하고 낯선 음을 하나의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마디에서 그 엉뚱한 음을 감싸 안는 새로운 화음과 프레이즈를 얹어내는 일이다. 어긋났던 소리는 그 뒤에 어떤 음이 이어지느냐에 따라, 무대를 망칠 뻔했던 실수가 아니라 애초에 그 자리에 놓이기로 작정되어 있던 매혹적인 불협화음의 출발점으로 뒤바뀐다. 즉흥 연주에는 지워야 할 오답이란 없다. 이미 울려 퍼진 소리 다음에 무엇을 얹어 다음 마디로 건너가느냐가 그 음의 의미를 결정할 뿐이다.

건반에서 삐져나온 엉뚱한 음처럼, 우리가 살아오며 내렸던 서투른 선택들 역시 그 순간에는 하나의 절박한 필연이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여정은 이 어긋남을 대면하는 사유의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서른둘의 나이에 펴낸 첫 책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철학의 모든 난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믿었다. 명료한 논리 언어만이 세계를 담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그는 전 재산을 기부하고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매일 교실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살아있는 말, 시장통의 촌부들이 주고받는 투박한 언어는 그가 구축했던 논리의 유리 온실에 결코 들어맞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작을 해체하며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작동하는 게임이라고 선언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남긴 1945년 '철학적 탐구'의 서문이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책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옛 책을 부끄러워해 감추거나 파기하지 않았다. 논고와 탐구라는 두 사유가 나란히 놓여 대조될 때에만, 옛 생각이 품고 있던 필연성과 그 사다리를 딛고 건너온 새 사유의 자리가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공학의 고전 '레거시 코드 활용 전략'을 쓴 마이클 페더스 역시 과거의 흔적을 대하는 시선에서 같은 통찰을 건넨다. 수년 전의 개발자들이 남겨놓은 뒤죽박죽인 코드를 보면 당장이라도 전부 뜯어고치고 싶어지지만, 페더스는 그 코드를 함부로 쓰레기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족한 납기와 촉박한 자원, 불확실한 요구사항 속에서 어떻게든 서비스를 살려내기 위해 당시의 동료들이 내릴 수 있었던 가장 치열한 타협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그때의 나는 게으르거나 사악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손에 쥔 정보는 턱없이 모자랐고, 마음은 미래를 향한 불안으로 쫓겼으며, 막막함을 나눌 지지대조차 없었다. 그 결핍의 막다른 골목에서 당시의 내가 쥐어짤 수 있었던 가장 절박한 선택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의 자신을 향해 가혹한 지적 자책을 멈추지 않는 결벽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웠고, 어떤 이들은 과거의 치기를 들키지 않으려 기억을 지우개로 문지르듯 부정하며 차가운 단절을 택한다. 하지만 생활인의 자리는 그 양 극단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벌주는 결벽도, 과거를 모조리 없던 일로 치부하는 억지스러운 단절도 아니다. 그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시절의 내가 마주했던 조건과 결핍을 또박또박 설명해 주는 일이다.

그때의 나는 그 시절의 조건 속에서 옳았고, 지금의 내 눈에 그것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내가 그사이 다른 마디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늦은 밤 불쑥 떠오른 지난날의 낯뜨거운 기억 앞에서, 이마를 짚으며 자책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때 왜 그랬는지, 그 시절 내가 쥐고 있던 결핍의 목록을 하나씩 헤아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당시의 나는 어떤 두려움에 쫓기고 있었는지, 어떤 막막함 속에서 그 서투른 말을 내뱉었는지, 그 시절의 맥락을 꼼꼼하게 복원해 주는 것이다.

잘못 누른 건반을 향해 화를 내느라 연주를 멈춰버리는 것은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는다. 어긋나게 튀어나온 소리를 다음 마디의 화음으로 받아안으며 연주를 묵묵히 이어가는 즉흥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서투른 어제의 나를 마주할 때 필요한 것은 조롱도 비난도 아니다.

그때는 그것이 내 최선이었음을 이해하고, 그 서툰 마디를 딛고서야 비로소 지금의 내가 건너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

어쩌면 지난날의 나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온당한 대답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출처

  1.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Basil Blackwell / Macmillan원전
  2.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Penguin Books / Jonathan Cape
  3. Working Effectively with Legacy CodePrentice Hall원전
  4. Mingus Plays Piano: Spontaneous Compositions and ImprovisationsImpulse! Records (A-60)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