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41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If Only We Had Said Something Else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하고 자꾸 뒤돌아보는 마음을 그냥 지켜본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맬 월드런 · 쇠렌 키르케고르 · 실수
떠나가는 사람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싱크대 앞에 서서 그릇을 닦는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찬물이 하얀 사기그릇의 굽을 훑고 지나가고, 수세미에 묻어 있던 거품이 손마디 사이에서 조용히 꺼진다. 건조대에서 마른 수건을 걷어 접거나,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을 때도 그렇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미 끝나버린 대화의 한 구절이 불쑥 귓가에 달라붙는다.

어느 찻집 구석 자리, 테이블 위에서 식어가던 머그잔 표면의 미세한 균열과 맞은편에서 고개를 떨구던 사람의 움츠러든 어깨가 떠오른다. 그 정적 속에서 내가 굳이 골라 뱉어버린 날 선 문장 하나가 귓전을 친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던 순간의 팽팽하던 실내 공기, 상대를 몰아붙이며 지었던 나의 옹졸한 입매가 몇 분 전 일처럼 선명하다. 물을 틀어둔 채 손을 멈춘다. 물줄기가 손등을 타고 내려가 차갑게 식는다.

왜 우리는 지나가 버린 장면을 이토록 집요하게 되감는가. 머릿속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다른 갈래의 대화가 다시 적히기 시작한다. 그때 그 모진 말을 삼켰더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찻잔만 매만졌더라면,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더라면. 내가 택하지 않았던 대답들이 저마다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 지금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것은 떠나간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 순간에 내가 얼마든지 다른 태도를 고를 수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며,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을 확인하는 부끄러움에 가깝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1841년 약혼녀 레기네 올센과 파혼한 뒤 평생 그 선택의 궤적을 곱씹었다. 그는 1843년 자신의 일기장에 적었다. 철학이 말하듯 삶은 오직 뒤로 돌아보며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때문에 삶이란 앞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또 다른 명제를 잊어버린다.

키에르케고르의 고백처럼 우리는 늘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야, 상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말의 진짜 무게를 알아차린다.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발걸음과,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난 문장을 확인하려는 시선 사이에서 하루의 리듬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취소할 수 없는 과거를 끊임없이 눈앞으로 불러내어 스스로를 옥죄는 이 되감기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다음 시간으로 건너갈 수 있는가.

취소할 수 없는 말의 무게 앞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말 왈드론의 생을 떠올린다. 1957년부터 빌리 홀리데이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마지막 숨결까지 건반으로 받쳐주었던 그는, 1963년 심각한 약물 과다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뇌는 손상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기술은 물론, 악보를 읽는 법과 자신의 이름마저 백지처럼 지워진 상태였다. 한때 비밥의 속주와 복잡한 화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그의 손가락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왈드론은 자신이 과거에 녹음했던 레코드들을 틀어놓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건반의 자리를 하나씩 다시 더듬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과거의 속도와 기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을 원망하며 피아노를 덮어버리는 대신, 그는 자신이 칠 수 있는 남겨진 조건 위에서 음악을 다시 시작했다. 현란한 아르페지오 대신, 자신이 확실하게 누를 수 있는 단 두세 개의 단음과 어둡고 묵직한 왼손의 코드를 끝없이 반복하는 법을 찾았다.

그것은 1959년 그가 작곡하고 재키 맥린의 알토 색소폰과 함께 녹음했던 대표작 'Left Alone'에서 이미 싹트고 있던 소리였다. 그 시절에도 왈드론의 피아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왼손은 같은 마디의 저음을 심장의 고동처럼 묵묵하게 반복하는 오스티나토를 만들고, 오른손은 화려한 기교 대신 서글프게 부딪히는 불협화음을 끈질기게 짚어 나갔다. 사고 이후 그는 이전의 복잡한 속주로 돌아가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고, 'Left Alone'에서 탐색했던 그 집요한 반복의 감각을 자신의 고유한 어법으로 삼았다. 건반을 잘못 짚었다고 해서 다음 마디로 허둥지둥 도망치지 않고, 방금 낸 둔탁한 음을 오히려 한 번 더 묵직하게 누르며 곡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흉내 내지 않고, 손끝에 남겨진 결핍을 딛고 서서 새로운 소리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갈라놓았다. 그의 기준에서 이미 뱉어버린 말과 어제의 선택은 완벽하게 통제 밖의 영역이다. 스토아의 처방은 단호하다. 지나간 일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괴로워하는 것은 이성의 오류이며, 바꿀 수 없는 외적 조건에 매달려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드는 헛수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릿속에서 번지는 후회를 끊어내고, 오직 지금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내면의 의지로 돌아오라고 요구한다.

논리적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운 명령이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사람의 마음은 도표를 그리듯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불쑥 찾아오는 자책을 억지로 틀어막으려 애쓸수록, 억누른 생각은 오히려 더 거센 힘으로 솟구쳐 방 안을 채운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 후회의 고리를 쉽게 끊어내지 못했다. 그는 파혼의 부채감을 평생 글쓰기의 연료로 삼으며, 그 고통을 영원한 실존적 비극이자 신 앞의 단독자라는 드라마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평범한 인간들이 나누는 소박한 온기로부터 자신을 격리해야 했다.

스토아가 지나간 감정을 억지로 도려내려 했다면, 키에르케고르는 후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져 자신을 소진시켰다. 왈드론이 피아노 앞에서 보여준 태도는 그 양극단 사이의 좁은 길을 가리킨다.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비장한 탄식을 쏟아내지도 않았고, 자신이 겪은 결핍을 짐짓 없었던 일처럼 꾸미지도 않았다. 즉흥 연주에는 취소 버튼이 없다. 한번 허공에 울려 퍼진 음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우리가 지난 대화에서 뱉어버린 거친 한마디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엄연한 제약이다.

머릿속에서 자책의 각본이 돌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멈추려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왈드론이 남겨진 몇 개의 단음을 묵묵히 바라보며 건반을 누르듯,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마음을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지켜볼 수 있다.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하고 울려 퍼지는 자책의 소리를 하나의 거칠고 낯선 연주처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체념이나 방관이 아니다. 엎질러진 말을 취소할 수 없다는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뒤늦은 이해의 파도를 온몸으로 통과시키는 일이다.

마른 수건으로 접시의 물기를 조용히 닦아 찬장에 넣는다.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골목길의 가로등이 주황빛 불을 밝힌다. 머릿속을 맴돌던 지난 대화의 잔향이 조금씩 잦아들고, 싱크대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물소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귀에 닿는다.

우리는 어제의 실수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뱉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의 무거운 그림자를 주머니 속에 가만히 넣어둔 채로, 다만 오늘 저녁의 밥을 안칠 뿐이다. 왈드론의 왼손이 묵묵히 제 박자를 지키며 곡을 완성해 나갔듯, 삶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불협화음들을 품에 안은 채 계속 흘러간다.

출처

  1. Left Alone - Mal Waldron (Bethlehem Records, BCP-6045)Bethlehem Records원전
  2. Journals and Papers of Søren Kierkegaard (Entry IV A 164)Indiana University Press원전
  3. Gjentagelsen (반복)C.A. Reitzel / 한길사원전
  4. Discourses and Selected Writings (담화록 및 도덕 편람)Oxford World's Classics / Penguin Classics원전
  5. Visions of Jazz: The First Century (Chapter: Mal's Compulsion)Oxford University Press
  6. Conversations with Mal Waldron / JazzTimes ArchiveJazzTimes원전
  7. Søren Kierkegaard: A BiographyPrinceton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