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54

포개어지지 않는 시간들

Times That Do Not Overlap

부모는 내 늙음을 보지 못하고, 자식은 내 청춘을 기억하지 못한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롤랑 바르트 · 듀크 엘링턴 · 시간 · 늦음
각자 갈 길 갑시다

일요일 점심, 본가 식탁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사과를 깎고 있다. 낡은 스테인리스 과도가 껍질을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낮게 울린다. 관절염으로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 검버섯이 내려앉은 손등. 껍질은 얇게 이어지지 못하고 서너 번 툭툭 끊기며 도마 위로 떨어진다. 그 느릿한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문득 거실 벽면에 걸린 오래된 액자로 시선이 옮겨간다.

빛바랜 원목 액자 안에는 사십 년 전의 결혼사진이 들어 있다. 1980년대 컬러 인화지 특유의 푸르스름한 색조 속에 서 있는 두 남녀. 지금 내 나이보다 십 년은 더 젊었을 어머니의 손은 주름 하나 없이 희고 매끄럽다.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에는 세상을 아직 겪어보지 않은 청년의 풋풋한 긴장이 묻어난다. 벽면의 저 팽팽한 손과, 지금 식탁 위에서 사과를 쥐고 조심스럽게 힘을 주는 노인의 손. 두 손이 하나의 생애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부모의 늙어가는 모습을 매주 지켜보지만, 그들이 통과해온 눈부신 청춘의 한낮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반대로 부모는 나의 성장기를 속속들이 알지언정, 머리가 세고 주름이 깊어질 노년의 풍경을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배우자는 흙장난을 치며 울던 내 어린 시절의 골목길을 모르고, 아이들은 내가 한때 품었던 청년기의 서투른 열정을 짐작하지 못한다. 친구조차 직장에서 홀로 삼켜낸 무수한 침묵의 사연들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인간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생애의 전체 시간을 온전히 공유하지 못한다. 관계란 나란히 놓인 두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에 가깝다. 속도가 맞아떨어지는 짧은 구간에서만 잠시 창문 너머의 얼굴을 마주 볼 뿐, 분기점을 지나면 각자의 역을 향해 제 갈 길로 멀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자연스러운 사실을 잊어버린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가 내 지나온 모든 아픔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부모에게 내 젊은 날의 방황을 다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연인이 내 말 못 할 유년의 상처를 헤아려주지 못할 때 마음속에서 불쑥 서운함이 솟구치기도 한다. 상대의 시계와 내 시계가 같은 초침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기대가 클수록, 어긋난 바늘 틈새로 피로와 원망이 스며든다.

이 어긋남의 실체를 빛바랜 사진 앞에서 깊이 파고든 이가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다. 그는 어머니 앙리에트를 떠나보낸 뒤 깊은 상실감 속에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인화지 한 장을 발견했다. 1898년 프랑스의 한 온실에서 찍힌, 당시 다섯 살이던 어머니의 흑백 사진이었다. 오빠와 함께 조그마한 손을 모으고 서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기 한참 전, 아직 어머니라는 이름조차 얻지 못했던 한 가녀린 소녀의 얼굴.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그 순간의 충격을 고백하며 "그녀의 유년기는 내게 닫혀 있다"고 적었다.

아무리 지극한 사랑으로 결속된 모자 관계라 해도, 자식에게 허락된 것은 어머니라는 긴 생애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광활한 과거가 있었고,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끝내 가닿지 못할 고독한 미래가 남겨져 있었다. 바르트가 응시한 것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과 결코 하나로 포개어질 수 없다는 시간의 엄혹한 단절이었다.

이 어긋남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고, 서로 다른 세월의 궤도를 그대로 인정한 채 음악을 빚어낸 순간이 있다. 1962년 9월 26일, 뉴저지 엥글우드 클리프스의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에서 마주 앉았던 듀크 엘링턴과 존 콜트레인의 만남이다.

당시 듀크 엘링턴은 예순셋의 나이로 1920년대 코튼 클럽의 스윙 시대를 호령했던 노장이었고, 서른여섯의 존 콜트레인은 굳어진 화성을 깨뜨리며 프리 재즈의 격랑으로 나아가던 탐험가였다. 스윙 빅밴드의 정교한 질서를 세운 거장과, 미지의 소리를 찾아 거침없이 내달리던 젊은 연주자 사이에 스물일곱 해의 세월이 놓여 있었다.

임펄스 레코드에서 발매된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의 문을 여는 명곡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세대의 어긋난 보폭을 다루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엘링턴이 건반 위로 얹어놓는 첫 피아노 아르페지오는 마치 나뭇잎에 맺힌 이슬처럼 투명하고 담백하다. 그는 화려한 화음으로 공간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듬성듬성 비워둔 쉼표 사이로 젊은 연주자가 들어설 틈을 조심스럽게 열어둘 뿐이다.

콜트레인은 그 열린 공간으로 걸어 들어와 두텁고 메마른 숨결이 묻어나는 톤으로 멜로디를 노래한다. 선배의 스윙 주법을 흉내 내지 않는다. 자신의 호흡에 밴 애수와 긴장감을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엘링턴 역시 자신만의 유려한 타건으로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위에 정갈한 쉼표를 찍는다. 두 사람은 한 멜로디 안에서 호흡을 맞추지만, 결코 상대의 시대로 억지로 건너가거나 상대를 자신의 시대로 끌고 오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세월에 선 채 서로의 톤이 울릴 수 있는 거리를 남겨둔다. 4분 남짓한 연주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에 남는 것은 완벽한 일치감이 아니라, 두 시간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은 채 빚어낸 아름다운 울림이다.

그러나 재즈 연주의 합의와 우리의 현실은 다른 길을 걷는다. 녹음실 안에서는 마디와 템포라는 약속을 통해 4분 동안 두 세대의 아름다운 협연을 완성할 수 있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마주하는 삶은 전혀 다르다. 각자의 노화와 죽음, 엇갈리는 세월의 피로를 결국 저마다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냉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유년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상처를 어루만지며 비극적인 애도의 심연에 머물렀다.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이와 비슷한 가족의 풍경을 그렸다. 장남의 기일에 모인 가족들은 옥수수 튀김을 부치고 옛 가요를 흥얼거리며 하루를 보내지만, 부모와 자식의 시간대는 끊임없이 어긋난다. 어머니가 바라던 차를 태워주지 못하고 부모를 모두 떠나보낸 뒤, 주인공 료타는 혼잣말을 남긴다. "늘 이런 식이다. 조금씩 늦는다." 고레에다는 그 늦음에서 오는 자책과 씁쓸한 여운을 스크린에 새겼다. 반대편에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며, 흘러가버린 시간의 무자비함에 저항하여 지나간 모든 기억과 타인의 사연을 남김없이 복원해 하나의 완전한 문학적 건축물 속에 포개어 넣으려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어긋난 시간을 채울 수 없는 결손으로 보며 슬퍼할 이유도, 뒤늦음을 자책하며 가슴을 칠 까닭도, 모든 기억을 남김없이 복원해 포개겠다는 욕망을 품을 필요도 없다. 애초에 서로 다른 궤도를 도는 두 존재가 잠시 한 식탁에서 마주 앉아 갓 튀겨낸 옥수수 튀김을 나누어 먹었다면, 그 찰나의 교차 자체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타인의 전 생애를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향한 무리한 요구를 거두게 된다. 부모가 내 청춘의 모든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부모의 늙어감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고 해서 죄스러운 것도 아니다. 서로의 시간을 다 포갤 수는 없다는 자각은 체념이 아니라,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상대를 온전한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기 위한 성숙한 거리두기다.

내가 지나온 모든 유년의 떨림과 청춘의 부끄러움을 온전히 품어줄 유일한 목격자이자, 마지막 숨까지 곁에 머물러줄 단 하나의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 타인에게 내 모든 외로움을 알아달라고 매달리는 동안, 우리는 정작 평생을 곁에 두고 돌봐야 할 자기 자신을 가장 모질게 방치해 온 것은 아닐까.

이번 주말, 다시 가족의 집을 방문하거나 오랜 친구와 마주 앉을 때 문득 대화의 보폭이 맞지 않아 짧은 침묵이 찾아올 수 있다. 부모의 시선이 내 말귀를 놓치거나, 친구가 내 지나온 계절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 속으로 서운해하거나 입술을 깨물 필요는 없다. 엘링턴과 콜트레인이 그러했듯, 찻잔과 찻잔 사이에 쉼표 하나를 그대로 놓아두면 된다. 각자의 궤도를 인정하며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제 몫을 다한 셈이다.

그리고 밤이 깊어 불 꺼진 방으로 돌아와 외투를 옷걸이에 걸 때, 공간을 채우는 침묵은 더 이상 차가운 고립이 아니다. 타인에게 내 전 생애를 알아달라고 조르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정적은 비로소 온전한 나의 몫으로 편안해진다.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내 무수한 흔들림을 혼자서 겪어내며 여기까지 걸어온 단 한 사람. 그 유일한 동반자인 나 자신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담백하게 하루를 닫아도 좋은 밤이다.

출처

  1.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 Journal de deuilCahiers du cinéma / Gallimard / Seuil (Roland Barthes, 1980, 2009)원전
  2. 歩いても 歩いても (Still Walking) & 映画を撮りながら考えたことBandai Visual / Misuzu Shobo (Kore-eda Hirokazu, 2008, 2016)원전
  3.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Impulse! AS-30)Impulse! Records / ABC Records (1963)원전
  4.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Éditions Gallimard (Marcel Proust, 1913-1927)원전
  5. The House That Trane Built: The Story of Impulse RecordsW. W. Norton & Company (Ashley Kahn,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