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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ARDS / 개념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독일어로 '손해·불행(Schaden)'과 '기쁨(Freude)'이 결합된 단어로, 타인의 불행이나 실패를 보며 은밀한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심리를 뜻한다.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에서 타인의 추락을 구경하며 자신의 무사함과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수동적 방관자의 기제로 분석한다.

글
사월
발행

어디서 나온 말인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손해, 피해, 불행'을 뜻하는 독일어 명사 샤덴(Schaden)과 '기쁨, 환희'를 뜻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진 말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은밀한 기쁨'을 가리킨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 다른 언어에서도 이 미묘한 감정을 한 단어로 옮길 마땅한 표현이 없어 독일어 원어를 그대로 빌려 쓴다.

서양 철학사에서 이 감정을 도덕철학의 중심 문제로 정면에서 다룬 인물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1840년 발표한 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Preisschrift über die Grundlage der Moral) 제14절에서 인간 행위의 동기를 분석하며, 모든 참된 도덕의 뿌리인 '연민(Mitleid)'의 정반대 극단에 샤덴프로이데를 놓았다.

쇼펜하우어는 이 저작에서 질투와 샤덴프로이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매섭게 규정했다.

'질투를 느끼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샤덴프로이데를 즐기는 것은 악마적이다. 타인의 행복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기뻐하는 것에서 더 큰 악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후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2권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제27절에서 이 감정을 종교적 악마성 대신 심리학적 시각으로 다시 해부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타인의 추락이나 망신을 보며 기뻐하는 이유는, 거친 세상 속에서 늘 불안하고 왜소했던 자신이 타인의 불행을 통해 '적어도 지금 나는 저 사람보다 안전하고 우월하다'는 상대적 안도감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흔한 오해

오늘날 유튜브 이슈 채널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시사 칼럼에서 샤덴프로이데는 유명인의 몰락이나 가십 소비를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개념을 둘러싸고 두 가지 흔한 오해가 반복된다.

첫 번째 오해는 샤덴프로이데를 일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악인들만 느끼는 병리적 감정으로 치부하는 시선이다.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스미스가 《고통의 기쁨》에서 분석했듯, 샤덴프로이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수시로 작동한다. 특히 자신보다 잘나가는 사람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자존감이 위축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의 실패 소식은 상처 입은 자존감을 일시적으로 달래주는 진통제처럼 작동한다. 내가 땀 흘려 성취하지 않아도, 남이 추락하는 것만으로 내 위치가 올라간 듯한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해는 타인의 실패를 조롱하거나 파멸을 구경하는 일을 '정의 구현'이라는 도덕적 명분으로 합리화하는 태도다. 물론 부당한 특권을 누리던 이가 법적 책임을 지는 과정에 시민이 안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샤덴프로이데는 종종 정당한 비판을 넘어, 한 인간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안전한 방 안에서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집단적 관음증으로 변질된다.

미국의 비평가 수잔 손택이 2003년 저작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경고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화면 너머로 재난이나 참상을 바라볼 때, 구경꾼은 '나는 저 비극의 바깥에 안전하게 서 있다'는 안도감과 '나는 불의를 미워하고 약자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라는 도덕적 위안을 동시에 누린다. 손택은 아무런 성찰이나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 안전한 관람석의 소비가 타인의 고통을 한낱 스펙터클로 전락시킨다고 지적했다.

그가 삶에서 도달한 태도

타인의 불행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이 안락한 방관자의 시선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유자와 예술가는 어떤 태도를 택했을까.

수잔 손택은 평생 서재의 평론가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비극을 사진과 화면으로만 소비하는 현대 사회의 위선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90년대 내전으로 포탄이 쏟아지던 사라예보로 직접 들어가 시민들과 함께 지하 방공호에서 지내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다. 그녀에게 비극을 직시한다는 것은 안전한 거리에서 혀를 차며 안도하는 일이 아니라, 구경꾼의 특권을 내려놓고 고통의 현장과 나의 일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일이었다.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가 1939년 뉴욕의 클럽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인종차별적 린칭의 참상을 고발한 곡 〈Strange Fruit〉를 불렀을 때의 무대 원칙 역시 같은 결단에 서 있었다. 홀리데이는 이 곡을 부를 때 클럽의 모든 서빙을 멈추게 하고 객석의 불을 전부 끈 채 얼굴에 핀조명 하나만 남겼다. 노래의 마지막 음이 끝나자마자 조명은 암전되었고, 그녀는 박수도 앙코르도 받지 않은 채 무대 뒤로 퇴장했다.

객석의 관객들이 슬픈 노래를 들으며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거나, 박수갈채를 보내며 값싼 도덕적 면죄부를 챙겨 돌아갈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줄 자극제로 삼지 않겠다는 것, 비극 앞에서 구경꾼의 안락한 박수를 거절하는 것이 그들이 도달한 태도였다.

오늘 우리의 한 주에서

늦은 밤 불을 끈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다 보면, 알고리즘은 어김없이 누군가의 실수와 몰락, 참혹한 사고와 분쟁의 소식을 눈앞으로 밀어 올린다. 잘나가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영상을 보며 댓글 창을 스크롤할 때, 우리 마음 밑바닥에는 '그래도 내 삶은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얄팍한 안도감이 스친다.

그러나 타인의 추락을 구경하며 얻는 안도감은 소금물을 마셔 갈증을 달래는 일과 같다. 남이 넘어지는 장면을 백 번 돌려본다 한들, 내일 아침 내가 직접 치러내야 할 숙제가 단 하나라도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남의 불행을 품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작 내 손으로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패할 용기는 점점 줄어든다.

구경꾼의 시선에서 빠져나오는 법은 복잡하지 않다. 타인의 불행이나 스캔들을 생중계하는 자극적인 썸네일이 눈앞에 떴을 때, 호기심을 따라 엄지손가락을 누르는 대신 화면을 잠그는 것이다.

자정이 넘은 방 안에서 푸른 화면의 조명을 끄고 스마트폰을 침대 협탁 위에 뒤집어 내려놓자. 남의 무너진 하루를 훔쳐보며 얻는 값싼 위안 대신, 어두워진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땀 흘려 부딪혀야 할 일과를 하나씩 헤아려 보는 것. 구경꾼의 객석에서 일어나 내 삶의 바닥에 두 발을 딛는 순간은 그 작은 손동작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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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샤덴프로이데는 어원이 무엇인가요?

독일어 명사 '샤덴(Schaden, 손해·피해·불행)'과 '프로이데(Freude, 기쁨·즐거움)'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우리말 속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의 반대편에 놓인 심리로,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가리킵니다.

철학자들은 샤덴프로이데를 어떻게 평가했나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질투는 인간적이지만 샤덴프로이데는 동정심의 정반대에 놓인 악마적 감정이라고 엄격히 비판했습니다. 반면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를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자가 타인의 추락을 보며 자신의 안전과 우위를 확인하려는 나약한 비교 심리로 해부했습니다.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사람은 모두 사이코패스나 악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심리학은 샤덴프로이데가 낮은 자존감, 상대적 박탈감, 혹은 공정성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보편적인 인간 감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미디어가 이 감정을 자극해 타인의 비극을 안전한 오락거리로 소비하게 만들 때 윤리적 무감각이 깊어집니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심리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요?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짚었듯, 안전한 방 안에서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며 얻는 값싼 안도감이나 감상적 연민을 경계해야 합니다. 남의 추락을 구경하는 화면을 끄고, 내 삶이라는 실제 무대 위로 직접 걸어 들어가 내 몫의 과제를 감당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출처

  1. On the Basis of Morality (Preisschrift über die Grundlage der Moral)Hackett Publishing / Cambridge University Press원전
  2.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타인의 고통)Farrar, Straus and Giroux / Picador원전
  3. The Joy of Pain: Schadenfreude and the Dark Side of Human Nature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