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10
타인의 비극을 훔쳐보는 안전한 방
A Safe Room for Other People's Tragedy
안전한 거리에서 구경하는 안도감과, 침묵 속에서 비극을 똑바로 응시하는 서늘한 목소리에 대하여.

자정을 훌쩍 넘긴 방 안, 불을 모두 끈 침대 위에 누워 스마트폰을 켜면 차가운 푸른빛이 얼굴 위로 쏟아진다.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기 위해 무심코 손가락을 튕기며 짧은 영상들을 넘기기 시작한다. 알고리즘은 누군가의 익살스러운 춤과 요리법 사이로, 어느 먼 도시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과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누군가의 억울한 파멸이나 법정에서의 다툼을 실시간으로 밀어 올린다.
손가락 끝을 몇 번 까딱이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재난과 타인의 무너진 생애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간다. 10초 남짓의 영상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표정, 붉은 화염과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화면 아래에는 저마다 안타까움을 표하는 댓글들이 줄지어 달린다. 우리는 그 장면을 묵묵히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작게 탄식을 뱉는다.
하지만 그 탄식의 바로 다음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아주 희미하고 은밀한 감각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적어도 지금 나는 저 무너진 콘크리트 밑에 있지 않다'는 서늘한 안도감. 내 방의 온도는 적당하고, 덮고 있는 이불은 바싹 말라 있으며, 창밖 골목은 고요하다.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면서도 그 참상의 바깥에 안전하게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이 기묘한 감정의 정체를 마주할 때, 우리는 손가락을 멈추고 불쾌한 서늘함 속에 화면을 끄게 된다.
불행을 구경하는 안전한 관람석
독일어에는 타인의 불행을 지켜볼 때 생겨나는 은밀한 쾌감이나 안도감을 가리키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꼭 악마 같은 심성에서 비롯되는 잔인한 악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그 불행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는 생존의 확인이자, 안전한 거리가 보장된 관람석에서 비극을 바라볼 때 피어나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가깝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사유자 수잔 손택은 2003년에 발표한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 미디어가 타인의 비극을 유통하고 소비시키는 방식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 손택이 지목한 가장 위험한 함정은, 우리가 타인의 비극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느끼는 감상적인 연민이 스스로에게 도덕적 면죄부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 화면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재난의 이미지를 볼 때, 우리는 비극에 마음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곤 한다. '나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선량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위안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나 손택이 지적하듯, 아무런 실천이나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 연민은 그저 안전한 방관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비극이 끝없는 이미지의 스펙터클로 소비될 때, 타인의 고통은 감정적인 자극재나 흥밋거리로 전락한다. 사진과 영상의 틀 너머에 실재하는 피와 비명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바라보며, 우리는 안전한 침대 위에서 감정의 파도를 잠시 즐긴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영상으로 손가락을 넘겨버린다. 비극을 구경하는 관객의 자리는 언제나 안락하고, 그 안락함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공범의 자리다.
카페 소사이어티의 불이 꺼질 때
1939년 4월 20일, 뉴욕의 월드 브로드캐스팅 스튜디오. 빌리 홀리데이는 코모도어 레이블을 통해 재즈 역사상 가장 이례적이고 불편한 곡 하나를 녹음했다. 원래 브롱크스의 유대계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아벨 미로폴이 1930년 인디애나주 메리언에서 벌어진 참혹한 흑인 린칭 사진을 보고 쓴 시에 곡을 붙인 〈Strange Fruit〉였다. 당시 빌리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던 대형 음반사 콜롬비아 레코드는 남부 시장의 반발과 판매 거부를 두려워하여 이 곡의 녹음을 거부했고, 프로듀서 밀트 게이블러의 결단으로 독립 레이블 코모도어에서 가까스로 빛을 보게 되었다.
소니 화이트의 쓸쓸하고 절제된 피아노 전주와 프랭키 뉴턴의 뮤트 트럼펫이 만들어내는 음산한 도입부가 지나간 뒤,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흐른다. 그녀는 스윙의 유쾌한 리듬이나 블루스의 화려한 멜리스마를 완전히 걷어냈다.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고 평평하며, 남부의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를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칼날처럼 단호하게 잘라 발음한다.
그것은 슬픔을 호소하거나 관객의 눈물을 유도하는 신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노래가 아니라 고통의 현장을 차갑게 가리키는 한 편의 부검 기록에 가까웠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미국 최초의 인종 통합 나이트클럽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빌리 홀리데이가 이 곡을 부를 때에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었다. 홀리데이는 언제나 무대의 마지막 순서로 이 곡을 불렀다.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 클럽 안의 모든 서빙과 주문이 전면 중단되었고 종업원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무대와 객석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빌리 홀리데이의 얼굴 위로 단 하나의 핀조명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소절의 단어 'crop'이 남긴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핀조명마저 암전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빌리는 이미 무대 뒤로 퇴장한 상태였으며, 인사도 앙코르도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는 침묵
일반적인 대중음악 공연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무대 위의 가수가 격렬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목청을 돋워 울부짖을 때, 객석의 관객은 그 감정에 이입하며 자신의 일상적 스트레스와 슬픔을 정화받는다. 공연이 끝나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앙코르를 외치며, 후련해진 기분으로 클럽 문을 나선다. 비극마저도 기분 좋은 소비의 상품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빌리 홀리데이가 연출한 무대는 관객에게 그 어떤 안락한 카타르시스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을 과장하여 관객의 동정심을 구걸하지 않았고, 노래가 끝난 뒤 관객이 박수로 자신의 도덕적 결백을 증명할 기회조차 박탈해 버렸다. 앙코르 없는 암전과 차가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이 술잔을 기울이며 안락하게 구경하던 음악이 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침묵 위에 세워진 비극임을 깨닫고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수잔 손택이 요구했던 '시선의 윤리'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손택은 고통을 다룬 이미지가 진정한 울림을 가지려면, 그것이 관객에게 손쉬운 눈물이나 도덕적 만족감을 주는 대신 보는 이를 부끄럽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안전하게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실은 타인의 고통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묻게 만드는 불편함이야말로, 비극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빌리 홀리데이의 건조한 프레이징은 비극을 노래라는 안전한 박물관에 가두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노래를 통해 관객을 위로한 것이 아니라, 관객이 차지하고 있던 안전한 관람석의 바닥을 무너뜨렸다.
다시 꺼진 화면 앞에서
새벽 세 시, 어둠 속에서 다시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검은 유리 화면을 바라본다. 스마트폰 화면은 꺼져 있고, 방 안에는 냉장고의 미세한 모터 소리와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타인의 비극을 손쉽게 목격하고, 또 그만큼 손쉽게 잊어버린다. 포털 뉴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SNS의 영상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며,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거리에서 타인의 불행을 훔쳐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든다. '나는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나는 저 비극에 마음 아파했다'는 값싼 연민의 조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가장 흔한 방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손택의 문장과 빌리 홀리데이의 마지막 암전을 통과하고 나면, 침대 위의 그 익숙한 안도감은 더 이상 편안하게 머물지 못한다. 타인의 아픔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영상처럼 구경하고 소비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밤 우리가 소비했던 그 무수한 타인의 비극들 뒤에, 우리는 어떤 표정을 남겨두어야 할까. 쉽게 덧붙이는 감상적인 위로의 말들을 거두고, 내가 딛고 선 이 안락한 자리가 실은 누군가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잠시 서늘한 침묵으로 머무는 일. 그것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한낱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출처
- Regarding the Pain of OthersFarrar, Straus and Giroux / Picador원전
- Strange Fruit: The Biography of a SongHarperCollins / Running Press원전
- Billie Holiday: Strange Fruit (National Recording Registry)Library of Congress
- The Joy of Pain: Schadenfreude and the Dark Side of Human Nature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