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09
탭마다 다른 얼굴로 사는 하루
A Day Across Different Tabs
회사 메신저와 친구의 대화창 사이에서, 우리는 흩어진 조각들일까 아니면 하나의 흐름일까.

늦은 오후 4시 20분, 데스크톱 모니터 위에는 열 개가 넘는 브라우저 탭과 메신저 창이 겹쳐져 있다. 푸르스름한 백라이트가 켜진 화면 한구석, 업무용 메신저 슬랙 창에서는 "확인했습니다. 요청하신 내용은 금일 퇴근 전까지 정리하여 공유드리겠습니다"라는 각진 존댓말을 입력하고 엔터를 누른다.
단 1초 뒤 바로 옆 탭으로 창을 전환한다. 친구들과의 단체 대화방에서는 방금 전의 정중함을 지우고 모음만으로 된 웃음과 거친 축약어를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또 다른 탭에는 주말에 읽을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둔 서점 페이지가 열려 있고, 화면 밑바닥에는 소리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 알림 창이 작게 깜빡인다.
창을 하나씩 마우스로 클릭하고 전환할 때마다 얼굴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풀어지고, 머릿속에서 고르는 단어의 온도와 문장의 길이가 순식간에 바뀐다. 식어버린 머그잔의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모니터를 바라보다 문득 손끝에서 서늘한 위화감이 묻어난다.
쪼개진 창문들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 동안 너무나 손쉽게 다른 사람이 된다. 어떤 창에서는 빈틈없이 유능하고 예의 바른 직업인이어야 하고, 어떤 창에서는 한없이 가볍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친구여야 하며, 혼자 남겨진 검색창 앞에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막막한 불안과 사소한 피로를 조용히 검색창에 적어 넣는다.
모니터의 탭을 바꿀 때마다 1초 만에 말투와 태도를 갈아치우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한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이 열 개가 넘는 창들 중에서 과연 진짜 내 목소리는 어느 쪽일까. 상황에 따라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쓰는 능숙한 연기자처럼 굴고 있지만, 혹시 우리는 그저 그때그때 필요한 태도를 흉내 내는 파편들의 모음집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회사에서의 나와 친구들 앞에서의 나, 그리고 늦은 밤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의 내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이 조각난 순간들이 도무지 하나의 일관된 생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서글픔이 찾아온다. 우리는 매 순간 정체성이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지는 듯한 피로를 느끼면서도, 어딘가에 변치 않고 고정된 '단 하나의 순수한 나'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완고한 강박에 스스로를 가두곤 한다.
열두 개의 조표를 건너가는 멜로디
1964년 12월 9일 늦은 밤, 뉴저지 잉글우드 클리프스에 위치한 루디 반 겔더 스튜디오.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은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 드러머 엘빈 존스와 함께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밤 단 한 번의 깊은 집중으로 완성된 세션이 바로 재즈 역사상 가장 숭고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A Love Supreme》이다.
앨범의 문을 여는 1악장 'Acknowledgement'에서 지미 개리슨의 묵직한 베이스는 네 개의 음(F - Ab - F - Bb)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모티프를 묵묵히 반복하기 시작한다. 앨범의 제목인 'A Love Supreme'이라는 네 음절의 운율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 모티프는,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소박하고 간결한 하나의 씨앗에 불과하다.
하지만 콜트레인은 이 소박한 네 개의 음을 하나의 안전한 자리에 가두어 두지 않는다. 재즈 역사가 루이스 포터가 면밀하게 분석했듯, 솔로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콜트레인은 이 4음 모티프를 12개의 모든 조표(all 12 keys)로 집요하게 조옮김하며 연주를 밀어붙인다.
반음 위로, 다시 완전4도 아래로, 전혀 다른 화성적 중심과 옥타브를 쉼 없이 넘나들며 색소폰은 같은 모티프를 계속해서 다른 높이와 다른 공명으로 터뜨린다. 어떤 음조에서는 차분하고 어두운 저음으로 웅크리고, 또 어떤 음조에서는 터질 듯 날카로운 고음으로 포효하지만, 그 열두 번의 변주 속에서 모티프의 본질은 단 한순간도 끊어지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콜트레인은 네 음의 모양을 바꾸는 대신, 그 네 음이 딛고 서 있는 세계의 좌표를 열두 번 전환함으로써 그 단순한 멜로디가 품고 있는 무한한 지평을 소리로 증명해 낸다.
바다와 파도의 문법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Ethica)》에서 세계의 존재 방식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사유했다. 당시의 데카르트적 전통 철학이 정신과 물질, 나와 타자, 세계를 서로 독립된 수많은 개별 실체들로 쪼개어 보았던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무한하고 영원한 '실체(Substantia)'만이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개별 사물들, 매 순간 달라지는 마음의 상태와 하루 동안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행동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이를 실체의 '양태(Modi)'라고 불렀다.
양태란 실체 밖으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고립된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실체가 특정한 관계와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자 변용(affection)이다.
드넓은 바다를 떠올려 보면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바다 위에는 때로 잔잔한 잔물결이 일기도 하고, 때로는 거센 파도가 솟구치며, 해안가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파도와 잔물결에 제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파도가 거세어졌다고 해서 바다가 여러 개로 쪼개진 것은 아니다. 파도와 물거품은 바다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가 바람과 바위라는 조건에 응답하며 만들어낸 순간적인 양태들일 뿐이다.
콜트레인이 단 하나의 4음 모티프를 열두 개의 서로 다른 조표 위에서 울려 퍼지게 했듯, 우리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다. 업무용 메신저에서 사용하는 각진 존댓말, 친구 앞에서 터져 나오는 거침없는 웃음, 혼자만의 방에서 마주하는 고요한 침묵은 서로 다른 세 사람이 번갈아 쓰는 위선적인 가면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하나의 온전한 생이 마주한 관계와 장소의 조건에 응답하며 스스로를 변주해 낸 정직하고 자연스러운 양태들이다.
우리는 조각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중심을 품은 채, 세상이 열어젖히는 다양한 조표 속으로 유연하게 걸어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창을 닫은 뒤에 남는 것
어느덧 창밖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고, 하루 종일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브라우저 창들을 하나씩 닫아 나간다.
경쾌한 마우스 클릭 소리와 함께 열 개가 넘던 탭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화면에는 마침내 깨끗하고 어두운 배경화면만이 남는다. 업무용 메신저의 각진 말투도, 친구와의 가벼운 농담도, 검색창에 남겨두었던 조용한 고민들도 화면 뒤로 물러선다.
그 모든 창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우리는 더 이상 낮 동안의 파편들을 억지로 이어 붙이려 애쓰지 않는다. 단 하나의 멜로디가 열두 개의 조표를 모두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악장이 되듯, 흩어진 탭과 수많은 말투를 통과해 온 오늘의 당신 역시 조금도 덜어지지 않은 온전한 하나의 생이다.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 방 안의 불을 켤 때, 조용히 마음속에 맴도는 질문 하나. 오늘 당신이 지나쳐 온 그 무수한 표정들 중에서, 온전한 당신의 울림이 아니었던 순간이 과연 단 하나라도 있었을까.
출처
- Baruch Spinoza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원전
- John Coltrane - His Life and MusicUniversity of Michigan Press원전
- A Love Supreme - John Coltrane (1965) (National Recording Registry)Library of Congress
- Spinoza's Modal Metaphys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