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08

돌이 굴러떨어져도 다시 건반 앞에 앉는 이유

Why We Sit at the Piano Again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침묵을 찢고 다음 화음을 누르는 손끝에 대하여.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빌 에반스 · 알베르 카뮈 · 상실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연주에 몰입한 빌 에반스

늦가을의 화요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밤새 내려앉은 찬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얇은 겉옷을 걸치고 주방으로 나가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꽃이 조용히 일렁이고, 창밖 골목길 위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첫 버스가 젖은 아스팔트를 가르며 지나간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해진 박자에 맞춰 덤덤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쥐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허탈감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어제 하루 온 힘을 다해 정리해 놓았던 일들, 마음을 다해 보살폈던 관계와 정돈해 둔 일상이 하룻밤 사이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는 기분. 어제 쏟았던 정성과 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것만 같고, 오늘 또다시 시작해야 할 반복과 수고의 무게가 서늘하게 손끝을 적신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세우고 다듬는다. 방을 치우고, 쌓인 설거지를 하고, 매일의 할 일을 정리하며,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타인과의 거리를 조율한다. 그러나 그렇게 공들여 맞추어 놓은 평온은 작은 바람 하나, 예기치 않은 단 한마디 말이나 사소한 어긋남에도 너무나 쉽게 흐트러져 버린다. 어차피 또다시 어지러워지고 허물어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일 아침 다시 신발 끈을 묶고 하루라는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허공 위에 지은 성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과 맺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계약에 기대곤 한다. 내가 성실하게 땀을 흘리고 마음을 바치면, 세상 역시 그에 걸맞은 안전과 보상을 돌려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묵묵히 다할 때 우리의 미래는 조금씩 더 단단한 지반 위에 놓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우리와 그런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 애써 쌓아 올린 계획은 예기치 못한 사고나 타인의 변심,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불운에 의해 단숨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정성을 쏟았던 관계의 단절, 오랜 노력이 무색해지는 허무한 결과, 혹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실 앞에서 우리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때 우리를 가장 깊숙이 무너뜨리는 것은 실패 그 자체의 아픔보다, 내가 그동안 바쳐온 모든 시간과 노력이 애초에 아무런 보증도 없는 허공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는 자각이다. 세상은 우리의 간절한 기대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우주는 우리의 성실함에 보답할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는 서늘한 사실. 그 차가운 침묵을 마주할 때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이 이렇게 허망하게 부서져 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가.

빌리지 뱅가드의 어두운 구석에서

1961년 6월 25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는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 드러머 폴 모션과 함께 재즈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전설적인 인터플레이 실황을 녹음했다. 피아노가 독점하던 멜로디의 권력을 내려놓고 세 악기가 동등한 대화를 나누며 만들어낸 그 유려하고 투명한 화음은, 에반스가 평생을 바쳐 꿈꾸어 왔던 가장 완벽한 음악적 안식처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순간은 채 열흘을 가지 못했다. 같은 해 7월 6일, 스물셋의 젊고 눈부신 천재였던 라파로는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음악적 절반을 단숨에 뜯겨나간 에반스는 깊은 충격 속에 피아노 뚜껑을 닫아걸었다. 그는 모든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플로리다에 있는 형의 집으로 내려가 몇 달 동안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끊었다. 음악을 한다는 것, 누군가와 완벽한 조화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환상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십수 년을 곁에서 함께했던 오랜 동반자 일레인이 1973년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1979년 봄에는 에반스가 평생 음악의 스승이자 정신적 버팀목으로 의지했던 친형 해리 에반스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잇따른 자살과 죽음 속에서 에반스 자신의 육체 역시 오랜 지병과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상식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모든 희망이 거세된 폐허의 삶이었다. 그러나 1980년 6월, 세상을 떠나기 불과 석 달 전 빌리지 뱅가드의 무대에 오른 빌 에반스는 결코 스스로를 연민하거나 패배의 늪에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베이시스트 마크 존슨, 드러머 조 라바베라와 함께 결성한 마지막 트리오의 무대에서, 그는 건반을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인 채 날카롭고 격렬한 타건으로 공기를 갈랐다. 'Turn Out the Stars'의 처연한 멜로디 위로 쏟아지는 그의 화음은 감상적인 슬픔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다음 순간의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지금 손가락 끝에 닿는 단 하나의 건반에 온 존재를 내던지는 서슬 퍼런 집중이자 현존이었다.

굴러떨어지는 돌을 향해 내려가는 사람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1942년에 발표한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고대 그리스의 형벌 우화를 불러낸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리며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는 순간, 바위는 가차 없는 중력에 이끌려 다시 산기슭으로 굴러떨어진다. 시지프는 다시 비탈을 걸어 내려가 바위에 어깨를 대고 밀어 올려야 하며, 이 헛수고는 영원히 끝없이 반복된다.

카뮈가 바라본 것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통스러운 노동의 순간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깊은 시선으로 응시한 자리는,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진 돌을 바라본 뒤 다시 산기슭을 향해 묵묵히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의 그 조용한 발걸음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에 의미와 이유를 묻지만, 세상은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 가혹한 불일치, 즉 명료함을 갈망하는 인간의 이성과 아무런 의미도 품고 있지 않은 차가운 현실 사이의 충돌을 카뮈는 '부조리(l'absurde)'라고 불렀다. 부조리를 마주한 대다수의 사람은 두 가지 손쉬운 도피처를 찾는다. 하나는 언젠가 천국이나 영원한 유토피아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헛된 종교적·이념적 환상에 기대는 것(카뮈는 이를 '철학적 자살'이라 불렀다)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물리적 자살'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 두 가지 도피를 모두 거부한다. 진정한 인간의 존엄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한 치의 속임수 없이 직시하면서도, 그 무의미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반항(la révolte)'에 있기 때문이다.

산꼭대기에서 돌이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신들의 저주를 비웃듯 뚜벅뚜벅 다시 바위를 향해 걸어 내려가는 시지프의 의식 속에서 형벌은 비로소 무력해진다. 그 순간 바위는 신들이 내린 징벌이 아니라 오롯이 시지프 자신의 운명이 되며, 비탈길을 내려오는 그의 발걸음은 굴복이 아닌 주체적인 결단으로 전환된다. 카뮈가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에반스가 모든 상실과 육체적 고통의 잔해를 짊어진 채 다시 빌리지 뱅가드의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그 피아노는 그에게 낭만적인 위로나 도피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바위였다. 어제 만들어낸 아름다운 화음이 오늘 아침의 비극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일 자신의 손이 영원히 굳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직시하면서도, 그는 도망치는 대신 지금 눈앞의 건반에 정직하게 손가락을 얹었다. 어떤 미래의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지금 울리는 이 한 음의 진실에 자신의 호흡을 바치는 일.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침묵에 맞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반항이었다.

다시 신발 끈을 묶는 아침

우리의 평범한 일상 역시 시지프의 비탈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오르고, 어제 끝마쳤던 일들을 다시 점검하며, 또다시 어긋나 버린 관계의 파편을 주워 담는 일. 우리가 공들여 쌓아 올린 작은 성취들은 계절이 바뀌듯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삶은 종종 우리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혹한 상실을 들이민다.

하지만 내일의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쏟아붓는 성실함의 무게를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오히려 어떤 영원한 약속도 주어져 있지 않기에, 지금 우리가 두 손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의 노동과 호흡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며, 영원불멸의 보상을 얻기 위해 돌을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부조리한 생의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일과 나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건반을 누르는 것이다.

방 안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빈 종이 위에 다시 한 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간다. 돌이 다시 굴러떨어질지라도, 우리는 오늘 아침 다시 신발 끈을 묶고 나만의 바위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그 무수한 무너짐 속에서도 결코 당신의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오늘 당신이 묵묵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당신만의 건반은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가.

출처

  1. Albert Cam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원전
  2. Bill Evans - How My Heart SingsYale University Press원전
  3. Complete National Recording Registry ListingLibrary of Congress
  4. Existential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