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33

내가 지어낸 사람 말고

Not the Person I Made Up

상대에게 내 뇌피셜 대본을 쥐여주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진짜 만남에 관하여.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레스터 영 · 빌리 홀리데이 · 에마뉘엘 레비나스 · 시선
레스터영과 빌리홀리데이

밤 열한 시, 어두운 방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이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낸다. 메신저 대화창 안에서 내가 보낸 긴 하루의 푸념 옆에 붙어 있던 숫자 1은 사라진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책상 위 머그잔 바닥에는 마시다 남은 커피가 차갑게 식어 얇은 얼룩을 만들고 있고, 창밖 골목길에서는 이따금 낯선 자동차의 바퀴 소리만 길게 스쳐 지나간다.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톡톡 건드린다. 상대방의 얼굴도, 그가 지금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방 안의 침묵 속에서 혼자만의 각본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메시지를 읽었는데 왜 답이 없을까.' '내가 오늘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는데, 어떻게 서른 글자도 안 되는 무미건조한 말로 대화를 끝낼 수 있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지금쯤 다정한 한마디를 얹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상대는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가상의 법정이 열리고 판결이 내려진다. 서운함이 차오르고, 이내 배신감과 원망이 목구멍까지 솟구친다. 그 사람과 나눈 다정했던 지난주의 대화는 순식간에 희미해지고, 방 안에는 오직 내 예측과 어긋난 상대에 대한 서늘한 분노만이 가득 찬다.

왜 우리는 가장 가깝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토록 손쉽게 머릿속 대본을 쥐여주는 것일까. 왜 상대의 침묵이나 표정 하나를 내 멋대로 재단하고는, 그 가상의 시나리오에 걸려 넘어져 혼자 상처받고 분노하는 것일까.

돌아보면 우리가 관계에서 겪는 수많은 다툼과 실망은 대체로 그 대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상대를 아낀다는 이유로, 혹은 가깝다는 핑계로 상대방의 이마 위에 보이지 않는 역할을 붙여둔다. '내 연인이라면 내가 우울할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해.' '내 오랜 친구라면 내 사소한 표정 변화만 보고도 마음을 알아채야 해.' 상대의 의사나 처지는 묻지도 않은 채, 내 결핍과 불안을 달래줄 완벽한 배우의 대사를 미리 적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내 기대와 다른 낯선 반응을 보이거나 엉뚱한 박자로 걸어올 때, 우리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며 상대를 탓한다. 하지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 서운함의 출처는 정말 상대방의 무심함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멋대로 지어낸 환상이 깨진 데서 오는 조급한 투정일까.

기원후 1세기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의 첫 장에서 인간이 겪는 비극의 뿌리를 단호하게 짚어냈다. 세상에는 '내게 속한 일'과 '내게 속하지 않은 일'이 있다. 나의 생각과 판단, 나의 태도는 내가 통제할 수 있지만, 타인의 마음과 행동, 타인이 내게 건네는 말과 표정은 결코 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을 불안과 분노에 빠뜨리는 것은 타인이나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성급한 판단과 기대라고 말했다.

타인이 내 뜻대로 반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자유를 내 손아귀에 쥐려는 조급함이다. 그 헛된 기대에 매달리는 한, 사람은 상대방의 사소한 말 한마디나 무심한 표정 하나에 하루의 평온을 몽땅 내맡긴 채 휘둘릴 수밖에 없다. 사랑이나 호의라는 그럴듯한 말 뒤편에서, 상대를 내 결핍을 채워줄 배우로 길들이려 하는 욕망. 그것은 상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대신, 내 안의 허상을 향해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억압에 가깝다.

1957년 12월 8일, 뉴욕 CBS 텔레비전 스튜디오 58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생방송 재즈 프로그램인 《The Sound of Jazz》가 촬영되던 현장이었다. 낡은 마이크 앞에 선 빌리 홀리데이와 레스터 영은 재즈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애틋한 궤적을 그려온 오랜 동료였다.

1930년대 중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특별한 이름으로 불렀다. 레스터 영은 빌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품 있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레이디 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빌리는 레스터에게 재즈의 영원한 대통령이라는 뜻으로 '프레즈'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생 세속적인 연인이나 부부라는 제도적 각본으로 얽히지 않았다. 서로에게 부양을 요구하지도, 자신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무를 씌우지도 않았다.

1957년 그날, 두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가장 참담한 폐허를 지나고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거듭된 마약 단속과 폭력적인 남편의 착취로 삶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할 수 있는 카바레 카드마저 박탈당한 상태였다. 젊은 날의 윤기 나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레스터 영의 상태는 더욱 처참했다. 2차 대전 당시 군형무소에서 겪은 인종차별적 가혹행위의 트라우마로 알코올에 빠져들었던 그는,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마른 채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의사는 그에게 연주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권고했고, 그는 리허설 빅밴드 세그먼트에는 참여조차 하지 못한 채 스튜디오 구석 벤치에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빌리 홀리데이가 직접 작사·작곡한 블루스 곡 〈Fine and Mellow〉의 순서가 되었을 때, 레스터 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카메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입술에 색소폰을 대고 불어낸 1분간의 솔로는, 전성기의 빠르고 유려한 기교가 완전히 증발해 버린 소리였다. 거친 숨소리가 섞인 앙상하고 쉰 음표들, 힘겹게 호흡을 이어가며 툭툭 떨어뜨리는 단 몇 개의 음뿐이었다. 완벽한 테크닉을 기대하던 비평가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것은 망가진 악사의 애처로운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이크 앞에서 노래하던 빌리 홀리데이는 레스터 영에게 그 어떤 화려한 기교도, 건강했던 옛 시절의 활력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입가에 말간 미소를 머금은 채, 쇠약해진 레스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는 왜 그것밖에 불지 못하느냐'는 채근도, 값싼 동정도 없었다. 그 눈빛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쇠약하고 상처 입은 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실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깊은 인정이었다. 냇 헨토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주조정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연출진과 스태프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고 썼다.

상대에게 구원자나 완벽한 연인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상대가 무너져 내린 순간에도 실망하거나 등을 돌리지 않았다. 서로의 폐허를 내 잣대로 고치려 들지 않고, 앙상한 호흡 하나까지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들어준 것이다.

타인을 내 뜻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태도일까.

20세기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서양 철학이 타자를 '나'라는 주체의 앎과 개념의 틀 안에 가두어온 지배의 역사였다고 고발했다. 우리는 늘 타인을 내 익숙한 경험과 지레짐작으로 설명하려 든다. 저 사람은 이런 성격이니까, 내게 호감이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반응해야 마땅하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보기에 타자는 결코 내 생각이나 기대의 틀로 포섭될 수 없는 무한이다. 타자는 내 머릿속 각본을 산산조각 내며 불쑥 다가오는 낯선 존재이며, 그의 벌거벗은 '얼굴'은 나를 향해 침묵 속에서 외친다. 나를 당신의 틀에 가두어 살해하지 말라고.

반면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선언했다.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유를 박탈해 하나의 굳은 사물로 만들어버리고, 나 역시 타인을 내 자유의 도구로 부리려 하기 때문에, 관계란 필연적으로 서로를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끝없는 시선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비관이었다.

타인의 얼굴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과, 타인의 시선이 만든 지옥에서 도망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번번이 길을 잃는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 자신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매일 사소한 말실수에 토라지고 서운해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성자 같은 무한 책임은 또 다른 숨 막히는 질식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관계는 지옥일 수밖에 없으니, 에픽테토스의 충고대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차가운 무감각으로 도피해야 할까. '어차피 남이니까 아무 기대도 하지 말자'며 상대를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체념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의 성숙이 아니라, 상처받기 두려워 미리 등을 돌려버리는 비겁한 알리바이에 가깝다. 레스터 영과 빌리 홀리데이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것은 냉담한 체념이 아니었다. 상대를 내 대본에 꿰어 맞추려는 기대를 거두는 일은, 상대를 포기하고 외면하는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환상의 안경을 벗어던지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의 떨리는 숨소리와 거친 상처에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는 가장 적극적인 경청이다.

재즈 연주자가 상대 연주자에게 '너는 세 번째 마디에서 이 화음을 짚어야 해'라는 기대를 품고 무대에 오르는 순간, 연주자들 사이의 내밀한 대화는 그 자리에서 뚝 끊기고 만다. 상대가 실제로 낸 낯선 음을 내 기대에 대한 배신이나 오류로 여기는 대신, '지금 상대가 저 음을 불었구나' 하고 그 실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비로소 다음 음을 건네며 화답할 수 있다.

상대에게 내 멋대로 대본을 쥐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를 방치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어떤 낯선 박자를 디디며 걸어오더라도 그 보폭을 함께 바라볼 준비를 하는 팽팽한 주의 집중이다. 내가 지어낸 완벽한 그 사람이라는 환상을 내 손으로 부수어야만, 비로소 그 폐허 속에서 피 흘리고 실수하며 살아 숨 쉬는 진짜 한 인간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다시 새벽의 적막한 방 안, 까맣게 꺼진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본다.

우리는 왜 그토록 상대방에게 완벽한 대본을 쥐여주지 못해 안달했던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실은 내 외로움과 결핍을 메워줄 고분고분한 인형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 서운함과 원망이 차오를 때, 우리는 손가락을 멈추고 어두운 방 안의 자신에게 가만히 물어볼 수 있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멋대로 지어낸 그 사람의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상대가 내 예상과 다른 투박한 말을 던져오거나 당혹스러운 침묵을 지킬 때, 그것을 나에 대한 공격이나 배신으로 단정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르는 일. 그 사람에게도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그만의 피로와 상처 입은 박자가 있음을 가만히 인정하는 일.

내 머릿속 대본을 가만히 내려놓을 때, 비로소 기대라는 이름의 조용한 폭력이 멈춘다. 그리고 내가 지어낸 그 사람의 환영이 흩어진 그 자리에서, 서투르고 부서지기 쉬운 진짜 두 사람의 정직한 대화가 시작된다.

출처

  1. The Sound of Jazz (CBS Television Network, Dec 8, 1957; Track: "Fine and Mellow", Columbia Records LP CL 1098)CBS Television / Columbia Records원전
  2. Listen to the Stories: Nat Hentoff on Jazz and Country MusicHarperCollins / Da Capo Press (Nat Hentoff)원전
  3. Wishing on the Moon: The Life and Times of Billie HolidayViking / Penguin (Donald Clarke)원전
  4. Lester Leaps In: The Life and Times of Lester "Pres" YoungBeacon Press (Douglas Henry Daniels)원전
  5.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Martinus Nijhoff (Emmanuel Levinas)원전
  6. Discourses and Selected WritingsPenguin Classics (Epictetus, trans. Robert Dobbin)원전
  7. L'Être et le Néant & Huis ClosÉditions Gallimard (Jean-Paul Sartre)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