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39
악역이 없는 자리에 남는 것
What Remains Where There Is No Villain
아무도 고의로 틀리지 않았어도 끝에 닿을 수 있다. 탓할 악역이 없는 파국 앞에서 남겨진 침묵을 견디는 일.

소리를 지르며 다툰 것도 아니고, 누군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극적인 파국도 아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드리운 늦은 밤, 차가워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말과 말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고,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혼자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추상적인 숫자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사물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극히 구체적인 부피와 면적으로 남는다.
현관에 나란히 놓여 있던 두 켤레의 신발 중 한 켤레가 사라진 자리, 불과 며칠 전 새로 채워둔 보리차, 그리고 식탁 맞은편에서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던 소리가 멎은 정적 같은 것들이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쏟아지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 가슴 한가운데가 휑하게 뚫린 것 같은 헛헛함, 그리고 명치 끝에 묵직하게 걸려 있는 답답함만이 말없이 방 안을 맴돈다. 슬픔이나 분노처럼 이름이 분명한 감정은 어디로든 쏟아낼 과녁이라도 있지만, 지금 찾아온 이 감정은 갈 곳을 알지 못해 텅 빈 거실 공기 중에 소리 없이 흩어질 뿐이다. 현관문 도어록이 잠기는 짧은 기계음 뒤로 찾아온 적막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무게를 띠고 방 안을 채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별 앞에서 명확한 원인을 찾는다. 누군가의 명백한 기만이나 용서하기 힘든 이기심 같은 구체적인 잘못 말이다. 파국의 책임이 한 사람에게 온전히 쏠려 있다면, 고통은 한결 다루기 쉬워진다. 그를 마음껏 미워하거나 비난하면서, 상처의 에너지를 바깥을 향해 거칠게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신감에 몸을 떨거나 원망의 말을 쏟아붓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적어도 감정이 나아갈 방향만은 선명하다. 미움은 아프지만 명료하고, 분노는 최소한 나를 지탱할 핑계가 되어준다.
하지만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이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마음은 길을 잃어버린다. 각자는 그저 자기 방식대로 성실하게 관계를 지키려 애썼을 뿐이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타이밍이 어긋났고, 피로 속에서 무심코 던진 서투른 한마디가 해명되지 못한 채 오해로 굳어졌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조심스럽게 내민 손길조차 상대에게는 또 다른 방어적인 태도로 비치며 새로운 상처를 낳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미세했던 틈새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 마침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인 동시에 상처를 입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도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우리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원망이 아니라, 악의를 품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 쓸쓸한 무죄의 사실이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이 서글픈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그가 관찰한 사랑의 파국은 사악한 악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비극은 상처받은 인간들이 지닌 지극히 보편적인 '서투름'에서 싹튼다.
우리는 상처를 입었을 때 '내가 지금 겁이 나고 당신의 다정함이 간절하다'고 품위 있게 고백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다.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문을 닫아걸거나 차갑게 입을 다물고, 때로는 뾰족한 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서투른 방어벽은 상대방에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이자 차가운 공격으로 가닿는다. 상대 역시 상처를 입고 자신의 벽을 높이 세우며 뒤로 물러선다.
자신을 지키려 둘러친 벽이 두 사람 사이의 시야를 가로막고, 상대를 해치려 한 적 없는 방어가 역설적으로 상대를 가장 아프게 밀어내는 무기가 된다. 아무도 상대를 파괴하려 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방어기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관계는 서서히 숨을 멈춘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짚어냈듯,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말들의 끝에서 인간은 마침내 지친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말을 보태는 것이 무의미해진 자리, 쥐고 있던 손을 힘없이 풀어놓는 단념의 순간이다.
드 보통은 이 서투름을 언어로 번역해 내는 성숙의 기술을 제안한다. 서로의 취약함과 유아적인 방어기제를 자각하고, '내가 지금 날을 세우는 것은 당신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관계를 다시 수선해 낼 수 있다는 희망이다. 상대의 어리석음을 나의 어리석음만큼이나 너그럽게 품어줌으로써, 균열이 생긴 자리를 인내로 메워나가는 현실적인 지혜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구체적인 시간의 끝에 선 자리에서, 현실은 조금 다른 표정을 짓는다.
삶에는 이해와 인내만으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마디들이 존재한다. 이미 너무 많은 대화가 어긋난 채 지나갔고, 그 사소한 오해와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서로의 표정과 침묵을 왜곡하는 굳은 필터가 되어버렸을 때가 있다. 아무리 서로를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악의가 없음을 알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일 자체가 서로에게 깊은 피로와 상처가 되어버린 상태다.
그럴 때 끝끝내 관계를 붙잡고 수선하려 애쓰는 것은, 도리어 서로에게 더 높은 벽을 쌓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관계 앞에서 억지스러운 조정을 거듭하는 일은, 지나온 시간 속에 깃든 아름다웠던 기억들마저 소음으로 덮어버릴 뿐이다.
어떤 관계에서는 끝을 인정하고 찾아온 침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더 깊은 존중이 된다. 더 이상 서로의 상처를 헤집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가만히 물러서는 일이다. 그 침묵은 무책임한 회피나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서로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아프고도 불가피한 마침표다.
지금 찾아온 공허와 답답함은, 미워할 악역이 없어서 생겨난 지극히 정직한 공백이다.
만약 둘 중 하나가 비겁했거나 시작부터 기만적이었다면, 차라리 원망이나 경멸 같은 명료한 감정 뒤로 숨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했기에, 탓할 곳 없는 이 무거운 공허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냉장고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만이 방 안을 채우는 저녁, 텅 빈 식탁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아무도 고의로 틀리지 않았는데도 멈춰 서야 했던 지난 시간을, 우리는 과연 실패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두 사람이 각자의 온전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도달한, 가장 고요하고도 품위 있는 마침표라고 불러야 할까.
출처
- The Course of Love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Hamish Hamilton / Penguin Books원전
- Why You Will Marry the Wrong PersonThe New York Times원전
-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Éditions du Seuil원전
- The School of Life: An Emotional EducationHamish Hamilton / The School of Life
- Jasmine - Keith Jarrett & Charlie Haden (ECM 2165)ECM Records원전
- Undercurrent - Bill Evans & Jim Hall (United Artists / Blue Note)Blue Note Records원전
-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Impulse! A-30)Impulse! Records원전
- Chet - Chet Baker (Riverside RLP 12-299 / Concord)Concord Records원전
- Some Other Time: The Lost Session from The Black Forest - Bill EvansResonance Records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