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59

비는 지나가고 보폭은 남는다

인생은 악물고 버티는 투쟁이 아니라, 지나가는 비를 맞으며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일이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알랭 드 보통 · 행동 · 불안
비오는 거리

지하철 출구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눅눅한 흙냄새가 마스크 틈새를 파고들었다. 지상으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채 서성이고 있었다. 아침 일기예보에는 종일 맑음이라는 아이콘이 선명하게 떠 있었지만, 먹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도심 위로는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우산을 챙겨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가방을 머리 위로 올려 든 채 편의점을 향해 뛰어가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날씨 앱을 새로고침했다. 건물 처마 밑으로 바짝 붙어 서서 젖어가는 신발 앞코를 내려다보던 한 사람이 곁에 선 동행에게 혼잣말처럼 툭 내뱉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인생은 진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걸까.'

지각을 알리는 메신저 알림이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을 울렸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행인의 손에서 젖은 테이크아웃 종이컵이 미끄러지며 차가운 라테가 회색 보도블록 위로 둥글게 번져나갔다. 빗줄기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젖은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발을 굴렀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화요일 아침의 공기는 무언가에 크게 배신당한 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꽤 자주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낀다. 몇 주 동안 야근하며 준비한 기획서가 상사의 사소한 기분 때문에 퇴짜를 맞을 때, 모처럼 시간을 내어 떠난 여행 첫날 독감에 걸려 침대에 누워야 할 때,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산 주식의 그래프가 파란색으로 곤두박질칠 때 그렇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는 어김없이 같은 물음이 솟아오른다.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 억울함의 밑바닥에는 현대 사회가 은밀하게 퍼뜨린 거대한 약속이 놓여 있다.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삶은 마땅히 순탄해야 하며, 예측 가능한 시간표를 따라 평온하게 흘러가야 정상이라는 믿음이다. 학교와 미디어, 서점가의 매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긍정적인 기대와 통제력을 권한다. 미래를 상상하고 최선을 다하면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은, 언뜻 인간에게 용기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삶이 계획대로 굴러가야 마땅하다는 전제를 품는 순간, 일상에 찾아오는 모든 불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나를 겨냥한 부당한 폭력으로 둔갑한다. 길을 걷다 발끝에 채인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세상 전체가 골탕 먹이려 작정했다는 피해의식에 빠져든다. 비가 내리는 것은 대기의 순환일 뿐이지만, 우산을 깜빡한 날 내리는 비는 어쩐지 나만 노린 짓궂은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좋은 일만 가득한 삶은 없고, 나쁜 일만 연거푸 쏟아지는 삶도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행운과 불운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뒤섞여 굴러온다. 그럼에도 매번 나쁜 일이 터질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왜 내 인생만 이 모양이냐며 멈춰 서서 억울해한다면 매일의 생활은 비장한 방어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 대신 끝없는 소모전으로 느끼게 만드는 원인은, 어쩌면 닥쳐온 궂은 날씨가 아니라 '내 삶에는 비가 오지 않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기대 그 자체다.

영국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2004년에 펴낸 저서 《불안》에서, 현대인이 만성적인 불행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이라고 짚었다. 과거의 인간들은 세상이 불완전하고 고난투성이 골짜기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고, 서로의 마음이 어긋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세계의 기본값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상황이 바뀌었다. 과학과 산업이 눈부신 성과를 거두자,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결함과 불운 역시 기술적으로 제거 가능한 오작동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보통은 바로 이 대목에서 고대 스토아 철학의 시선을 다시 불러낸다.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이들이 매일 아침 "오늘 나는 무례한 사람을 만날 것이고, 배신을 겪을 것이며, 뜻하지 않은 재난을 볼 것이다"라고 되뇌었던 까닭은 세상을 비관해 방구석에 주저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은 본래 결함투성이이며 불운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바닥을 마음에 깔아둘 때, 인간은 비로소 사소한 배신이나 차질 앞에서도 분노의 비명을 지르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할 일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연현상임을 납득하고 나면, 억울함이 걷히고 오늘 내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보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의 삶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포로로 붙잡혀 독일 드레스덴의 지하 도축장 냉동창고에 갇혀 있던 그는, 연합군의 화염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불바다와 잿더미로 변하는 참상을 겪었다. 도축장의 두꺼운 지하 콘크리트 벽 덕분에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지만,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인간의 문명과 선의에 대한 거창한 신념은 이미 남김없이 타버린 뒤였다. 보네거트는 훗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쓴 대표작 《제5도살장》에서, 평생에 걸쳐 반복되는 한마디를 남겼다.

'뭐 그런 거지(So it goes).'

소설 속에서 누군가 목숨을 잃거나, 공들인 계획이 무너지거나, 납득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날 때마다 보네거트는 감정을 쥐어짜는 긴 수식어 대신 그 한 문장을 덧붙였다. 삶을 포기한 사람의 냉소나 비아냥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과장된 비련의 각본을 쓰지 않고,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사실로 내려놓으며 당장 눈앞에 닥친 다음 순간의 숨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보네거트는 훗날 자전적 에세이 《나라 없는 사람》에서 자신의 삼촌 알렉스의 말을 빌려 또 다른 문장을 건넨다. 삼촌 알렉스는 여름날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서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처럼 일상의 사소하고 평화로운 순간이 찾아오면, 하던 말을 멈추고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이게 좋은 게 아니면, 도대체 뭐가 좋은 거란 말인가?'

두 사람이 도달한 태도는 겉보기에 세상의 흔한 위로들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들의 방식이 세상의 얄팍한 처세술들과 갈라지는 지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의 조언자들은 고통과 실패 앞에서조차 억지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모든 시련에는 사람을 단련하기 위한 뜻이 있다거나, 훗날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설명은 불운을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낸 허상에 가깝다.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억지 교훈을 찾는 행위는 감정을 왜곡할 뿐이며, 머지않아 더 깊은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반면 알랭 드 보통과 커트 보네거트가 취한 태도는 불운에 어떤 숭고한 의미도 덧씌우지 않는다. 오늘 아침 쏟아진 비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훈련이 아니다. 대기 중에 수증기가 뭉쳤고, 우연히 내 머리 위로 떨어졌을 뿐이다. 이번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사실의 확인이야말로, 온종일 이어질 억울함과 감정의 낭비를 끊어내는 가장 깔끔한 선 긋기다.

하지만 보통과 보네거트의 사유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심의 아침과는 조금 다른 길로 뻗어나간다. 드 보통의 사유는 서재의 관조에 머무는 편이다. 책상 앞에 앉아 세상의 부조리를 지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날카롭지만, 젖은 바짓단을 털며 당장 회사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에게 관조는 너무 먼 이야기다. 보네거트의 태도 역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참화에 맞서기 위해 다듬어낸 실존적 블랙유머라는 점에서 매일의 사소한 피로와 온전히 포개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진짜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은 거대한 비극의 참호도, 우아한 사유의 서재도 아닌 화요일 아침의 복도다. 재즈 즉흥 연주를 떠올려보면 이 차이는 한결 분명해진다. 합주 도중 연주자가 순간적인 착오로 엉뚱한 건반을 눌러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미숙한 연주자는 당황하여 손을 멈추거나, 연주를 끊고 인상을 찌푸리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무대를 수없이 겪어낸 연주자는 빗맞은 음이 울렸다고 해서 템포를 늦추거나 박자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잘못 짚은 음을 있는 그대로 공중에 흘려보내며, 한 박자의 여유를 두고 곧바로 다음 마디의 코드로 손을 뻗어 스윙을 이어간다.

불운을 마주하는 생활인의 태도 역시 이와 같다. 언제든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률을 기본값으로 삼는다는 것은, 삶에 닥쳐온 궂은 날씨를 그저 지나가는 비로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비는 피할 수 없지만, 비를 맞았다고 해서 걷는 속도까지 바꿀 이유는 없다. 이번엔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옷을 털어내고, 원래 내가 걷던 보폭을 지키며 다음 블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불운을 삶의 자연스러운 상수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반대편에 놓인 반가운 일들이 제 빛을 찾기 시작한다.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맑게 갠 하늘 한 자락이나 정류장에서 마침 도착한 버스 한 대,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동료와의 가벼운 농담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뜻밖의 덤으로 다가온다. 기대를 바닥으로 낮추어 두었기 때문에, 작은 행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보네거트의 삼촌처럼 소리 내어 감탄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좋은 게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좋은 것이겠는가.

비는 어느덧 잦아들어 가느다란 물안개로 바뀌어 있었다. 지하철 출구 앞에 멈춰 서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겉옷의 모자를 털어내며 젖은 보도블록 위로 발을 디뎠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신발 틈으로 차갑게 스며들었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 악물고 참아내는 것인지 묻는 질문은, 어쩌면 굵은 비가 쏟아지는 찰나에 피로가 불려놓은 과장된 의문인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며, 원래 가려던 방향을 향해 제 걸음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것.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내 걸음의 템포까지 내줄 필요는 없다.

당신은 오늘 걸려 넘어질 뻔한 작은 돌부리 앞에서 하루를 다 망쳤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가. 아니면 젖은 무릎을 툭툭 털어내고, 언제든 비는 올 수 있는 거라며 같은 속도로 다음 교차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출처

  1. Status AnxietyHamish Hamilton (Alain de Botton, 2004)원전
  2. Slaughterhouse-FiveDelacorte Press (Kurt Vonnegut, 1969)원전
  3. A Man Without a CountrySeven Stories Press (Kurt Vonnegut, 2005)원전
  4. The Optimism Bias: A Tour of the Irrationally Positive BrainPantheon Books (Tali Sharot, 2011)
  5. The Consolations of PessimismThe School of Life (Alain de Botton, 2017)원전
  6. Go! (Blue Note BLP 4112)Blue Note Records (Dexter Gordon, 1962)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