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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Τὰ εἰς ἑαυτόν

《명상록》(Τὰ εἰς ἑαυτόν)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 천막에서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쓴 사적인 일기이자 스토아 철학의 실천 기록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한 교훈서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비극과 혼란 속에서 오직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판단을 지키고 자신의 공적 책무를 다하려 했던 치열한 내면의 요새다.

글
사월
발행

어떤 책인가

서기 161년부터 180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끝맺는 마지막 오현제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게르만 부족과의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전선에서 보내야 했고, 제국을 덮친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동방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의 반란과 여덟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비극까지 겹쳤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도나우강 유역의 카르눈툼과 시르미움 군영에서, 황제는 야전 침상에 기대어 작은 기름 램프 불빛 아래 글을 썼다. 이 기록이 바로 오늘날 고전으로 꼽히는 《명상록》(Meditations)이다.

책의 본래 제목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타 에이스 헤아우톤》(Τὰ εἰς ἑαυτόν)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로마 황제가 굳이 그리스어로 글을 쓴 이유는, 이것이 공문서나 연설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글을 남에게 읽히거나 사후에 출판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 공포와 환멸이 숨통을 조여올 때마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건넨 사적인 독백이었다.

전체 12권으로 나뉜 이 글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으로 거친 현실을 견뎌내려 했던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의 일기장에 가깝다. 남들의 평판이나 재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 오직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판단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에만 집중할 것. 책의 문장들은 황제라는 화려한 칭호 아래서 한 인간이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 생생한 흔적이다.

흔한 오해

《명상록》을 둘러싼 가장 흔한 오해는 이 책을 대리석 궁전에 편안히 앉은 황제가 여유로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한가로운 사색의 잠언집이나 자기계발서로 여기는 시선이다. 세속의 정점에 선 군주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읊조렸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태어난 공간은 진흙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 천막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평생 극심한 만성 흉통과 위장 장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매일 아침 수많은 병사의 생사와 제국의 명운을 결정해야 하는 중압감 속에 살았다. 그가 쓴 평온의 문장들은 극한의 스트레스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쥐어짠 생존의 처방전이었다.

두 번째 오해는 스토아 철학 특유의 표현을 곡해하여, 모든 인간적 감정을 억누르고 차갑게 얼어붙은 돌부처처럼 살라는 금욕주의로 읽는 것이다. 흔히 '스토익(Stoic)'이라는 단어가 무감각한 태도를 뜻하는 말로 쓰이면서 생긴 오독이다.

아우렐리우스가 도려내고자 했던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솟아나는 병적인 격정(passion), 즉 분노와 원망, 시기심이었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는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었을 때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자신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카시우스가 암살되어 그 목이 로마로 전해졌을 때, 얼굴을 돌리며 적장을 살려 용서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불운을 마주했을 때 세상을 저주하며 영혼을 갉아먹는 분노였다.

세 번째 오해는 세상이 허무하니 현실 정치나 사회적 책임을 팽개치고 은둔하라는 도피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을 서로 돕도록 태어난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았다. 아침마다 지친 몸을 일으키기 힘들 때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 내가 태어난 목적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인 그 일을 하러 가면서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철학은 현실의 무거운 짐을 끝까지 짊어지게 만드는 지탱목이었다.

그가 삶에서 도달한 태도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에서 도달한 태도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 명제인 '통제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에 뿌리를 둔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명확히 나뉜다는 자각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판단과 욕망, 선택, 그리고 불운을 대하는 태도뿐이다. 반면 타인의 평판, 육체의 질병, 전쟁의 결과, 과거의 사건 등은 결코 나의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다. 아우렐리우스는 괴로움의 원인이 외부 사건 자체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조건에 매달리며 그것을 바꾸려 드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외부의 사물은 영혼에 닿을 수 없다. 사물은 바깥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를 뒤흔드는 불안과 고통은 오직 우리 내면의 판단에서 생겨난다.'

이 분리를 통해 그가 세워 올린 것이 바로 철학자 피에르 아도(Pierre Hadot)가 명명한 '내면의 요새(Inner Citadel)'다. 세상이 전쟁과 전염병으로 뒤흔들리고 타인들이 비난과 배신을 쏟아내더라도, 내면의 이성이 판단을 바르게 유지하는 한 어떤 풍파도 영혼의 중심을 침범할 수 없다. 비극이 닥쳤을 때 절망하는 대신, 이러한 불운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의연하게 머물 수 있으니 행운이라고 사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하는 주권적 시선이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악의 예행연습(Premeditatio Malorum)'을 처방했다. 《명상록》 2권 1절에서 그는 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다짐한다.

'동틀 녘에 스스로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무례한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거짓말쟁이, 시기심 많은 이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까닭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과 악의 추함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들 역시 나와 같은 피와 이성을 나눈 동포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 중 누구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나 또한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할 수 없다.'

근거 없는 낭만적 기대가 불러오는 환멸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지혜였다. 세상에 결함 있는 인간과 예상치 못한 불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수로 인정할 때, 우리는 억울한 일 앞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다음 행동으로 걸어갈 수 있다. 앞날의 걱정에 압도되어 허덕이는 대신, 지금 당장 내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과제만을 떼어내어 마주하는 태도, 그것이 황제가 천막 안에서 남긴 사유였다.

오늘 우리의 한 주에서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면 스마트폰 화면들이 저마다의 성공과 소비를 깜빡인다. 소셜 미디어에는 남들의 화려한 성취가 이어지고, 메신저에는 예상치 못한 업무 지시와 날 선 말들이 도착한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타인의 변덕으로 어그러지거나 동료의 무신경한 평가에 온종일 마음이 긁힐 때, 우리는 쉽게 무력감과 분노에 휩싸인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째서 세상은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가.'

《명상록》은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우리를 멈춰 세운다. 지금 당신을 뒤흔드는 그 사건이 정말로 당신의 본질을 훼손했는가. 타인의 무례함, 결과의 실패, 뜻밖의 불운은 당신의 통제 범위 안에 있었는가. 바깥의 소란에 흔들려 평정을 내어준 것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의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는가.

아우렐리우스의 태도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호언장담과 거리가 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기분이나 평가에 에너지를 낭비하던 손길을 거두고,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맞서 소리치는 대신 그가 지닌 결함을 세상의 풍경으로 넘겨버리는 일이며, 계획이 어긋났을 때 신세를 한탄하는 대신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을 가늠하는 일이다.

노트북 화면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아 호흡을 고른다. 흩어진 메모지와 볼펜을 손끝으로 가지런히 모아둔다. 창문을 조금 열어 저녁 거리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소란스러웠던 하루의 소음과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의 날씨에 휩쓸리지 않고, 오늘 나에게 허락된 책상 위에서 내가 마주할 단 하나의 문장을 짚어나갈 뿐이다.

함께 읽을 에세이

자주 묻는 질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왜 전쟁터에서 《명상록》을 썼나요?

게르만 부족과의 마르코만니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 측근의 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황제로서의 막중한 책무와 개인적 공포를 견뎌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죽음과 불운의 공포 앞에서 매일 밤 스스로를 다잡는 영적 훈련이자 자기 대화였습니다.

《명상록》의 원래 제목은 무엇인가요?

고대 그리스어로 '타 에이스 헤아우톤'(Τὰ εἰς ἑαυτόν)이며,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말(To Himself)'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쓰이는 '명상록(Meditations)'이라는 제목은 후대 편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 본래는 누구에게도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황제의 비밀스러운 사적 비망록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요새'란 무엇인가요?

외부의 사건(전쟁, 질병, 타인의 배신이나 비난) 자체는 결코 인간의 영혼을 직접 해칠 수 없으며, 모든 고통은 그 사건에 대해 자신이 내린 왜곡된 판단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바깥세상과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의지를 분리하여,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율적 판단의 중심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아침마다 배신자와 무례한 사람을 떠올리라는 '악의 예행연습'은 왜 필요한가요?

세상을 비관하거나 타인을 혐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극과 배신을 삶의 자연스러운 상수로 미리 인정하여 뜻밖의 충격에 분노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불운을 사전에 마주함으로써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부서지는 것을 막고, 현실 속에서도 차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완수할 수 있게 돕습니다.

출처

  1. Marcus Aurelius: Meditations (Ta Eis Heauton)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World's Classics, Translated by Robin Hard)원전
  2. The Inner Citadel: The Meditations of Marcus AureliusHarvard University Press (Pierre Hadot, Translated by Michael Chase)원전
  3. Marcus Aureli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