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25

망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끝까지 노를 젓는다

Only Who Knows It Might Fail Rows to the End

다 잘될 거라는 낭만적 기대가 산산조각 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바닥 삼아 다시 노를 쥐는가.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빌리 홀리데이 · 실수
망망대해 노 젓는 사람

창밖으로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부엌 식탁에 앉아 식어가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가만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시간이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거나, 병원의 검사 결과를 앞두고 있거나,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삶의 고비를 앞두고 있을 때 찾아오는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가 잦아들고 벽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또렷해질 때, 스마트폰 화면에는 주변 사람들이 보낸 안부들이 조용히 불을 밝힌다. 어떤 이는 '별일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다 잘될 테니 마음 편히 가지라'고 등을 두드린다. 반대로 어떤 이는 '어차피 인생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며 일찌감치 체념의 갑옷을 권한다.

미지근해진 찻잔 표면에 맺힌 온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양쪽 모두 어딘가 미덥지 못하다. 잘될 거라며 현실의 징후를 눈감아버리는 말은 첫 번째 암초가 수면 위로 솟구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깨질 것이 뻔하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며 매사를 깎아내리는 냉소는 아직 닥치지도 않은 파도에 지레 익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의 '낙관(樂觀)'은 종종 첫 번째 태도, 즉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떻게든 다 잘될 거야'라고 맹신하는 태도와 혼동되곤 한다. 이른바 대가리 꽃밭이라 불리는 이 순진한 낙관주의는 위험의 징후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막상 예상치 못한 불행과 맞닥뜨렸을 때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 극단인 만성적 비관주의로 도망치는 순간 삶은 급격히 피폐해진다.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 행동을 시작할 최소한의 활력마저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이 두 갈래의 막다른 길에 부딪힌다. 근거 없는 맹신과 마비시키는 비관. 둘 중 어느 쪽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제대로 된 방향타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최악의 가능성을 똑바로 염두에 두면서도, 삶을 향한 건강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는 진짜 낙관주의는 어디에서 오는가.

배가 가라앉는 순간 가장 먼저 목숨을 잃는 사람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순진한 낙관주의자다. 베트남전 당시 하노이의 포로수용소에서 7년 넘게 갇혀 있던 제임스 스톡데일 중령은 그 가혹한 수용소의 겨울을 통과하며 뼈아픈 장면을 목격했다.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이들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근거 없이 믿었던 낙관주의자들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추수감사절이 지나도 철창문이 열리지 않자 그들은 거듭되는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끈을 놓아버렸다. 반면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스스로에게 잔인할 만큼 정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현실을 1밀리미터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이곳을 반드시 살아서 걸어 나가 이 비극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경험으로 만들겠다는 냉혹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스톡데일이 포로수용소에서 증명해 낸 것은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신뢰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진짜 낙관주의란 '가장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과 '결국에는 살아남아 삶을 가치 있게 만들겠다는 굳건한 긍정'을 한자리에 결합하는 태도라는 사실이었다. 최악을 똑바로 보는 일은 절망으로 뛰어드는 투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포가 부풀려놓은 허상을 걷어내고, 내가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바닥을 확인하는 작업에 가깝다.

서기 2세기, 다뉴브강 북쪽의 혹독한 진흙탕 전선에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천막 안에서 호롱불을 켜고 일기를 썼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제국 전역에 전염병이 번지고 반란과 이민족의 침략이 겹친 나날 속에서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을 향해 읊조렸다. 오늘 하루 너는 배은망덕하고 무례하며 불성실하고 질투에 눈이 먼 인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네 계획을 망칠 것이고 네 호의를 배신할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악의 예행연습'이라 부르는 이 훈련은 세상을 저주하는 염세주의자의 푸념이 아니었다. 배신과 실패, 질병과 죽음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눈앞에 그려보는 행위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풍파에 놀라 얼어붙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세우는 방패였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을 미리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람은 돌발 상황이 닥쳐도 경악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내 안의 선함과 이성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기에, 남은 힘을 오롯이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택과 마땅히 치러야 할 의무에 쏟아부으며 오늘 하루를 긍정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최악의 조건을 바닥에 깔아둔 채 앞날을 긍정하는 태도는 음악에서도 가장 서글프고 단단한 방식으로 울린다. 1958년 2월, 뉴욕 콜롬비아 30번가 스튜디오의 차가운 바닥 위에 섰던 빌리 홀리데이의 모습이 그렇다.

그 시절 홀리데이의 몸은 이미 회복하기 힘든 난파선과 같았다. 수십 년에 걸친 마약 복용과 학대, 간경화와 누적된 지병으로 인해 그녀의 폐와 성대는 심각하게 부서져 있었다. 1930년대 스윙 밴드를 이끌며 공기를 가볍게 띄우던 청아하고 탄력 넘치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음역은 1옥타브 남짓으로 쪼그라들었고, 음정은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며, 목구멍에서는 거칠게 긁히는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40인조 현악단을 이끌던 편곡자 레이 엘리스는 첫 마디를 부르는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온전한 음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홀리데이가 비관에 빠진 사람이었다면, 망가져 버린 목소리를 비관하며 마이크 앞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반대로 근거 없는 맹신에 취한 사람이었다면, 옛날의 맑은 고음이 나올 거라는 착각 속에 억지로 목을 쥐어짜다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홀리데이는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깨진 성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고음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거나 매끄러운 척 꾸미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박자를 뒤로 지연시키며 긴 여백을 만들었다. 숨이 차오를 때마다 문장 사이에 깊은 쉼표를 찍었고, 호흡이 끊어질 듯한 위태로움 속에서 음을 끌어당겨 현악 오케스트라의 정갈한 화성 위에 얹었다.

〈I'm a Fool to Want You〉를 부를 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부서진 몸이 내는 마찰음에 가깝다. 그러나 레이 엘리스와 스튜디오의 연주자들은 테이크가 거듭될수록 말을 잃었다. 그녀의 거칠고 파열된 음색이 완벽하게 조율된 바이올린의 선율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미성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절절한 무게를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최악의 사실을 바닥으로 받아들인 뒤, '이 부서진 목소리로도 나는 여전히 노래할 수 있다'는 끈질긴 긍정으로 마침내 한 곡을 완성해 냈다.

최악을 인정하면서도 삶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아 보이지만, 그들이 미래를 바라보고 긍정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아우렐리우스의 낙관은 끝내 이성의 엄격한 통제로 향한다. 그는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을 책임져야 하는 통치자였고, 자신의 감정이 흐트러지면 수많은 백성의 안위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가오는 고통과 배신을 미리 내다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내면 요새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성으로 차단막을 쳤다. 감정을 다스리고 동요를 지우며 공적 의무를 완수하는 부동심의 자세. 그에게 최악을 염두에 둔 낙관이란, 아무리 거친 폭풍우가 몰아쳐도 인간의 이성적 질서와 선함만큼은 결코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신뢰였다.

반면 빌리 홀리데이에게는 지켜야 할 제국도, 감정을 통제할 근엄한 이성의 요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늘 법과 제도 밖으로 밀려난 주변부였고, 상처는 피할 틈도 없이 살갗을 찢고 들어왔다. 그녀는 고통을 이성으로 분석하거나 초연한 척 봉합하지 않았다. 대신 찢긴 성대와 상처 입은 육체 그 자체를 마이크 앞으로 밀어 넣었다.

아우렐리우스가 이성의 힘으로 고통을 내려다보며 장화를 조여맸다면, 홀리데이는 흙탕물에 젖은 몸을 숨기지 않고 그 부서진 톤 자체를 음악의 심장으로 삼았다. 황제가 세상을 긍정하는 방식이 흔들리지 않는 규율과 이성에 대한 신뢰였다면, 보컬리스트가 삶을 긍정하는 방식은 이미 부서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도 다음 마디의 숨을 고르며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육체의 끈질김이었다. 하나는 이성의 절제를 통한 긍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처 입은 육체가 밀어 올린 블루스의 긍정이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은 거창한 제국의 흥망성쇠도, 녹음실의 드라마틱한 절규도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내일 아침 문을 열고 마주해야 할 지난한 삶의 숙제일 수도 있고, 몇 달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정체일 수도 있으며, 언제 어떻게 뒤틀릴지 모를 건강이나 관계가 던지는 서늘한 압박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다 잘될 거야'라는 무책임한 주문을 외우며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는 '어차피 망할 텐데'라며 자조의 늪으로 숨어든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그 무지성한 낙관도, 쉬운 비관도 아니다.

최악을 염두에 둔 낙관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 배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잔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첩 구석에 적어보는 일이다.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똑바로 인정하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짓누르던 막연한 공포는 힘을 잃는다. 파선은 이제 피해야 할 유령이 아니라, 언제든 닥칠 수 있는 계산된 바닥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바닥을 딛고 서서야 우리는 '비록 최악이 닥친다 해도 나는 끝내 헤쳐 나갈 것이며 어떻게든 내 삶을 다시 세워낼 수 있다'는 단단한 신뢰를 회복한다. 물이 새어 들어오고 파도가 높게 일더라도, 최악을 이미 가늠해 본 사람은 더 이상 헛된 희망에 속아 노를 놓치지도 않고,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 노를 내던지지도 않는다. 부서진 악기를 쥐고도 다음 마디의 박자를 늦춰 잡던 그 서늘한 호흡처럼, 우리는 묵묵히 오늘의 물살을 가른다. 망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끝까지 노를 젓는다.

출처

  1. Marcus Aurelius: Meditations (Ta Eis Heauton)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World's Classics, Translated by Robin Hard)원전
  2. The Inner Citadel: The Meditations of Marcus AureliusHarvard University Press (Pierre Hadot, Translated by Michael Chase)원전
  3. Billie Holiday: Lady in SatinColumbia Records (CL 1157 / CS 8048)원전
  4. Wishing on the Moon: The Life and Times of Billie HolidayViking / Da Capo Press (Donald Clarke)원전
  5. Ray Ellis on Billie Holiday: The Making of Lady in SatinDownBeat Magazine / Columbia Legacy Archive
  6. Courage Under Fire: Testing Epictetus's Doctrines in a Laboratory of Human BehaviorHoover Institution Essays, Stanford University (James B. Stockdale)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