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중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무심코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순간이 있다. 방 안의 불은 진작에 꺼졌고, 어두운 방 안에서 네모난 액정의 푸른빛만이 얼굴을 차갑게 비춘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으려는 목적도 없이 손가락을 밀어 올리다 보면, 얼마 전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옛 동료의 깔끔한 사원증 사진이나, 몇 해 전 갈림길에서 전혀 다른 전공을 택했던 친구의 정갈한 작업실 풍경이 피드 위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화면을 응시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춘다. 그리고 가슴 밑바닥에서 아주 오래되고 낯익은 질문 하나가 스멀거리며 고개를 든다. 그때 나도 다른 쪽 길을 골랐더라면 어땠을까. 3년 전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팔지 않았더라면, 혹은 지난달에 그 결정을 조금만 더 신중하게 내렸더라면, 지금 내 일상은 이보다 덜 삐걱거리고 훨씬 더 빛나고 있지 않았을까.
'그때 살걸, 그때 팔지 말걸, 그때 그 길을 택할걸.' 우리는 매일 밤 지나간 선택의 갈림길을 돌아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스스로를 '껄무새'라 부른다. 앵무새처럼 끝없이 '~할걸'이라는 말을 되뇌며 지난 결정을 후회한다는 이 씁쓸한 은어는, 사실 몇몇 사람의 유난스러운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짐을 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보편적인 굴레다. 이미 지나온 길 뒤편을 흘끔거리며, 가보지 않은 길 위에 존재할지도 모를 더 완벽한 나를 상상하느라 정작 오늘 내 손에 쥐어진 피로한 하루를 의심하고 갉아먹는다.
테드 창의 중편 소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2019)은 이 만성적인 기회비용의 공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매혹적인 사고실험을 선보인다. 소설 속 세상에는 '프리즘'이라 불리는 기묘한 양자 분기 장치가 존재한다. 이 작은 기기는 과거의 어떤 결정적 순간에 작동하여 두 개의 평행세계를 갈라놓고, 다른 선택을 내린 저편 세상의 또 다른 나, 즉 '파라셀프'와 실시간으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프리즘을 사 모은다. 그때 주식을 팔지 않았던 평행세계의 나는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는지, 그때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는 어떤 작품을 완성했는지를 훔쳐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기기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은 현명한 지혜가 아니라 지독한 질투와 무기력한 자괴감뿐이었다. 저쪽 세계의 내가 더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내 삶은 잘못된 분기에서 버려진 실패작'이라며 현실을 저주하고, 저쪽 세계의 내가 나보다 불행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옹졸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언제든 나도 저렇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는 불안에 떤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결국 후회는 남는다. 키르케고르가 《불안의 개념》에서 적었듯, 눈앞에 무수한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감각 그 자체야말로 인간의 발밑을 휘청이게 만드는 '자유의 현기증'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지를 품에 안고 싶어 하는 욕망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자아를 마비시키거나, 결정을 내린 뒤에도 지나간 선택의 유령을 곱씹느라 현재를 탕진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는 평행세계를 엿볼 양자 프리즘도, 과거의 선택을 물릴 실행 취소 키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삶은 언제나 결함투성이의 무대 위에서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된다. 1975년 1월 24일 밤 11시 30분, 독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의 텅 빈 무대 위가 바로 그러했다.
스물아홉 살의 키스 자렛은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낡은 르노 4 차량을 몰고 취리히에서 쾰른까지 장거리를 달려온 상태였다. 심한 요통 탓에 허리 보조기를 차고 있었고, 늦은 저녁으로 겨우 삼킨 음식은 뱃속을 불편하게 들쑤셨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진짜 재앙은 무대 위에 놓인 악기였다.
열일곱 살의 기획자 베라 브란데스가 요청했던 최고급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뵈젠도르퍼 290 임페리얼) 대신, 백스테이지 직원의 착오로 오페라 리허설 때나 쓰던 작고 낡은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건반을 눌러본 자렛은 경악했다. 고음역은 쨍그랑거리며 찢어지는 쇠소리가 났고, 저음역은 울림이 턱없이 부족해 둔탁한 깡통 소리에 가까웠으며, 서스테인 페달은 뻑뻑하게 굳어 음을 이어주지 못했다. 펠트는 닳을 대로 닳아 터치감마저 엉망이었다.
자렛은 도저히 연주할 수 없다며 차로 돌아가 숙소로 떠나려 했다. 1,400명이 넘는 관객이 늦은 밤 오페라 하우스로 모여들고 있던 그때, 기획자 브란데스가 쏟아지는 겨울비 속으로 뛰어나와 눈물로 애원했다. 차창을 내린 자렛은 빗물에 젖은 채 흐느끼는 어린 기획자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절대 잊지 마요, 오직 당신을 위해서 연주하는 겁니다.'
무대에 오른 자렛의 앞에는 원래 준비되었어야 할 웅장한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따위는 없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조율이 풀린 채 먹먹하게 굳어 있는 차가운 건반뿐이었다. 자렛은 자신의 연주 방식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울리지 않는 저음을 메우기 위해 왼손으로 바닥을 쿵쿵 울리는 롤링 오스티나토 리듬을 쉼 없이 내리쳤고, 찢어지는 고음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멜로디를 서정적인 중음역대에 머물게 했다. 페달이 울림을 만들어주지 못하자, 그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채 온몸의 체중을 실어 건반을 강하게 타격하며 손가락의 힘만으로 선율을 이어나갔다.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 시작을 알리던 네 음의 차임 벨 소리(G-D-C-A)를 그대로 따와 즉흥 선율의 첫머리로 삼았다. 그 불완전한 피아노 위에서 울려 퍼진 66분간의 독주 《The Köln Concert》는 훗날 350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솔로 피아노 음반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이 쾰른의 일화를 열악한 조건을 기적처럼 이겨낸 사람의 승리라는 진부한 이야기로 소비하곤 한다. 하지만 그 밤이 남긴 것은 악조건을 정복했다는 무용담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제약 앞에서 연주자가 취했던 실존적인 태도에 가깝다.
테드 창의 소설과 키스 자렛의 음악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어떻게 인간을 집어삼키는가라는 동일한 번민에서 출발하지만,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선다. 테드 창의 서사가 수많은 평행세계의 데이터를 대조해 보며 어떤 분기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 성품의 일관성을 확인하려는 지적 사유실험이라면, 키스 자렛의 재즈는 평행세계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물리적 현장에서 온몸으로 첫 음을 짓이기는 실존적 결단이다.
실시간 즉흥 연주에는 실행 취소가 없다. 일단 건반을 내리쳐 공기 중에 파동을 쏘아 올린 이상, 그 음은 좋든 싫든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즉흥 연주자가 연주 도중 삐끗하여 잘못된 음, 이른바 미스 톤을 짚었을 때 그를 구원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방금 친 음을 후회하느라 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불협화음을 바탕음 삼아 바로 다음 마디에서 새로운 화성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이미 내리친 음을 부인하지 않고, 그 음을 경과음으로 품어 안아 다음 선율을 직조해 낼 때 삐끗했던 음은 비로소 독창적인 전조의 출발점이 된다.
만약 자렛이 연주 내내 지금 내 손밑에 있는 것이 저 낡은 베이비 그랜드가 아니라 최고급 콘서트 그랜드였더라면 하고 머릿속으로 다른 피아노를 훔쳐보았다면, 쾰른의 음악은 단 세 마디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단칼에 잘라내고, 오직 눈앞에 주어진 결함투성이 피아노의 한계를 끌어안음으로써만 새로운 음악적 문법을 열어젖혔다. 선택하지 않은 길은 애초에 음악이 될 수 없다. 음악은 오직 이미 선택해 버린 단 하나의 음 위에서만 시작된다.
침대에 누워 다시 스마트폰을 끈다. 푸른빛이 사라진 방 안은 고요하고, 창밖에서는 가끔씩 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만이 빗물처럼 낮게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 뒤에는 언제나 선택받지 못한 무수한 가능성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그때 그 사람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하지만 그런 평행세계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갈림길을 흘끔거리며 미련을 곱씹는 일은, 지금 내 손밑에 놓인 삶이라는 악기를 팽개쳐둔 채 오지 않은 콘서트 그랜드를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은 예행연습이 없는 즉흥 연주이고, 오늘 우리 손에 쥐어진 피아노는 저음이 먹통이거나 페달이 뻑뻑한 결함투성이의 베이비 그랜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미 내린 결정이 다소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이었을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일은 뒤를 돌아보며 지난 음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을 딛고 다음 마디의 화성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출처
- Keith Jarrett: The Köln ConcertECM Records (ECM 1064/1065)원전
- Keith Jarrett: The Man and His MusicDa Capo Press / Grafton Books (Ian Carr)원전
- Vera Brandes on Keith Jarrett's Köln Concert: Never Forget, Only for YouBBC Radio 4 / The Guardian Archive원전
- Ted Chiang: Anxiety Is the Dizziness of FreedomAlfred A. Knopf (in Exhalation)원전
- Søren Kierkegaard: The Concept of Anxiety & Either/OrPrinceton University Press (Translated by Reidar Thomte and Howard V. Hong)원전
- Messy: The Power of Disorder to Transform Our LivesRiverhead Books / Penguin (Tim Har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