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19

수면 위로 끓어오르기까지의 온도

The Temperature Before Boiling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기적이라 부를 때, 수면 아래에서는 0도에서 99도까지 침묵의 잠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웨스 몽고메리 · 헤겔 · 시간 · 행동
웨스몽고메리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흔들리는 심야버스 안에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스마트폰 화면을 무심코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타임라인을 뒤덮는 낯선 이름들과 마주하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고리즘의 외곽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음악이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음악 방송의 짤막한 클립마다 수십만 개의 재생 수가 덧붙는다. 영상 아래 달린 댓글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탄성을 쏟아낸다. 도대체 이런 팀이 어디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왔느냐는 놀라움, 알고리즘의 축복을 타고 하룻밤 사이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감탄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돌연한 폭발을 사랑한다. 묵묵히 어둠 속을 걸어온 긴 시간보다는, 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존재가 오늘 아침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불쑥 솟아오르는 편이 훨씬 더 매혹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런 현상을 두고 우연한 행운이라 부르거나 반짝이는 재능의 승리라고 적는다. 하지만 좁은 화면 속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보컬을 뱉어내고, 정교한 손끝의 각도와 호흡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묘한 의구심이 스며든다. 저 단단한 균형감각과 여유로운 시선은 결코 어젯밤 우연히 배달된 행운으로 빚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직관 때문이다.

2년 전 데뷔해 최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걸그룹 리센느의 궤적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닮아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도약을 두고 '갑작스러운 발견'이라 부르며 신기해하지만, 지난 2년의 디스코그래피를 차분히 짚어본 이들은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안다. 2024년 봄 첫 싱글의 묵직한 베이스라인에서 출발해 향기라는 감각적 컨셉을 일관되게 구축하고, 수많은 음악 방송과 행사 무대 위에서 한 음 한 음 정직하게 라이브를 벼려온 시간들. 세상의 시선이 가닿지 않던 자리에서도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간 연습실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들의 호흡을 1도씩 데우고 있었다. 다만 세상의 귀가 그 온도를 알아채기까지 2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는 왜 언제나 결과의 찬란함 앞에서 그 이면에 누적된 시간의 무게를 지워버리는 것일까.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도약이란 늘 갑작스러운 파열로만 보이기 마련이다. 아무런 소문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수면 위로 솟구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비약의 밑바닥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상태로 조용히 부피를 불려가던 침묵의 축적이 자리 잡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양과 질의 관계를 사유하며 물의 끓는점을 예로 들었다. 냄비에 물을 담고 불을 지피면 물의 온도는 1도씩 천천히 올라간다. 10도, 40도, 70도, 그리고 99도에 이를 때까지 물은 겉보기에 아무런 극적인 변화도 보여주지 않는다. 온도계를 꽂아 숫자를 확인하지 않는 한, 1도의 물과 99도의 물은 똑같이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외형만 관찰하는 사람에게 99도의 물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정체된 상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이 99도에서 마침내 100도라는 임계점, 헤겔이 이름 붙인 '마디선'을 통과하는 순간, 액체는 격렬한 기포를 일으키며 기체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밖에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피어오르는 자욱한 수증기를 바라보며 비로소 '물이 끓는다'고 소리치지만, 정작 물을 수증기로 비약하게 만든 힘은 100도가 되는 그 마지막 1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런 기포도 일지 않던 차가운 0도에서부터 99도까지, 침묵 속에서 바닥을 달구었던 보이지 않는 열량의 총합이다.

재즈의 역사에서도 세상의 눈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처럼 보였던 순간들이 있었다. 1959년 9월, 색소포니스트 캐논볼 애덜리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작고 낡은 클럽 미사일 라운지에 들렀다가 한 무명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넋을 잃었다. 피크도 쓰지 않고 맨 엄지손가락으로 줄을 퉁기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묵직한 톤과 화려한 옥타브 주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애덜리는 곧바로 뉴욕의 리버사이드 레코드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에게 달려가 "지금 당장 계약해야 할 전대미문의 연주자가 있다"고 외쳤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 바로 전설적인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였다.

뉴욕의 평단과 재즈 팬들은 웨스 몽고메리라는 낯선 이름 앞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 유려한 옥타브 주법과 독창적인 핑거피킹을 두고 '밤하늘에 나타난 혜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찬란한 찬사 뒤편에는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낮에는 12시간씩 트럭 부품 공장에서 쇳가루를 마시며 일하고, 밤마다 여섯 아이와 이웃이 깰까 봐 앰프 볼륨을 극도로 낮춘 채 엄지손가락 끝에 두꺼운 굳은살이 박이도록 기타를 쳤던 15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피크 대신 엄지손가락을 쓴 것은 남다른 개성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밤새 소리 없이 연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며, 그 뭉툭한 살갗이 쇠줄과 부딪히며 만들어낸 15년의 잠열이 마침내 1959년이라는 마디선을 넘어서며 폭발했던 것이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증명받고 손쉬운 성과를 갈망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종종 99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성급하게 가스 불을 꺼버리곤 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재능이 없다'거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며 조용히 손을 놓는다. 100도에서 피어오른 타인의 수증기만을 부러워하며, 지금 내 냄비 바닥에서 조용히 덥혀지고 있는 잠열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시험은 마침내 역치를 뚫고 수면 위로 솟아오른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세상의 조명이 쏟아지고 박수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울 때, 우리는 과연 도약의 도취에 휩쓸리지 않고 0도에서 99도를 쌓아가던 그 고요한 작업실의 태도를 지켜낼 수 있는가. 웨스 몽고메리는 뉴욕 재즈 씬의 정점에 선 이후에도 자신의 주법에 대해 거창한 이론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는 랄프 글리슨과의 인터뷰에서 그저 "나는 악보를 읽을 줄 모르기에, 내 귀가 좋은 소리라고 말할 때까지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도약의 화려함에 취하는 사람과, 도약을 낳았던 축적의 감각을 자신의 본질로 간직하는 사람의 태도는 그렇게 조용히 엇갈린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인기는 매혹적이지만, 그 인기를 끝내 지탱하는 것은 언제나 수면 아래에서 묵묵히 채워 넣은 시간의 무게다. 2년의 계절을 건너 마침내 대중의 귀에 가닿은 아이돌의 정직한 라이브 속에서도, 15년의 어두운 밤을 지나 울려 퍼진 몽고메리의 옥타브 솔로 속에서도 공통으로 흐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축적에 대한 신뢰'다.

오늘 밤에도 수많은 이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상 앞이나 작업실 구석에서 차가운 물을 데우고 있을 것이다. 온도가 오르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답답하고 고요한 시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 않는 온도는 반드시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다.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몇 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가. 아직 수증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어제와 오늘 우리가 채워 넣은 열량이 헛된 것이었을까. 조급하게 냄비 뚜껑을 들썩일 필요는 없다. 물은 99도에 이를 때까지 가장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법이니까.

출처

  1. Science of Logic (Wissenschaft der Logik)Cambridge University Press원전
  2. Original Liner Notes to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Riverside Records / Concord Music원전
  3. Wes Montgomery on Jazz Casual (KQED-TV Archives)KQED / Library of Congress원전
  4. RESCENE Official Discography & Release RecordsTHE MUZE Entertainment원전
  5.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Riverside Records / Discogs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