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PLAYLISTS / 01

완벽한 계획을 세우느라 첫발을 떼지 못할 때

When You Cannot Take the First Step

진리는 머릿속 계획표 안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가르고 짚어낸 첫 음의 파동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글
사월
발행일
주제
루이 암스트롱 · 윌리엄 제임스 · 즉흥 · 행동
루이암스트롱

일요일 밤 열한 시가 넘어가면 방 안의 공기는 특유의 서늘한 무게를 띠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화면이 푸르스름하게 켜져 있고, 메모 앱 속에는 다음 주부터 시작할 프로젝트의 표와 체크리스트가 세로로 길게 늘어서 있다. 시간대별 세부 목표, 발생 가능한 리스크 목록, 각 단계마다 확인해야 할 참고 자료의 링크들이 정연한 글머리 기호 아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되어 있다. 몇 주째 주말마다 반복해서 열어보고 있는 문서다. 색색의 라벨을 바꾸고 마감 기한을 이틀 뒤로 미루며 폰트 크기를 다듬는 동안, 머그잔에 담긴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

화면 속의 설계도는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다. 마주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미리 계산해 두었고,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보완책까지 꼼꼼하게 적어 넣었다. 하지만 그 완결된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손가락 끝이 단단하게 굳어온다. 기획서를 실제로 전송하거나 첫 문장을 타이핑하는 일은 매번 '조금 더 확실한 자료가 모인 다음'으로, 혹은 '완벽한 컨디션이 갖춰진 내일 아침'으로 조용히 유예된다. 우리는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지도를 넓히고 또 넓히지만, 정작 방 문을 열고 바깥 계단을 내려서는 일은 끝없이 미뤄진다. 청사진이 완전무결해질수록 오히려 첫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될 때까지 기다리는 이 망설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진리나 올바른 답이 행동에 앞서 어딘가에 온전한 형태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완벽한 판단 기준이 머릿속에 먼저 확고하게 서 있어야만 비로소 오류 없는 첫 음을 누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 완벽을 다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안정감이 아니라 거대한 정적뿐이다. 책상 위에서 아무리 치밀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현실의 공기와 부딪히지 않은 생각은 단 한 뼘의 무게도 갖지 못한다. 머릿속의 완벽함이란 결국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탄생시키지 못하는 무균실의 평온에 불과하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관념의 닫힌 방을 향해 서늘하고도 명료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진리란 책상 서랍 속에 미리 완성되어 보관되어 있는 고정된 정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게 진리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어떤 생각이 참이 되는 것은 그것이 머릿속에서 얼마나 빈틈없이 조립되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구체적인 경험과 부딪히고 쓸모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실천적 과정 속에서다. 참된 것은 스스로 참이 되어가는 길을 걸어야만 비로소 증명된다는 뜻이다.

1928년 6월 28일, 시카고 오케(OKeh) 레코드 스튜디오의 마이크 앞에 섰던 루이 암스트롱의 몸짓이 정확히 그랬다. 'West End Blues'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 스튜디오 안에는 피아노도 드럼도 베이스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리듬의 안전장치도, 코드의 길잡이도 없는 적막 속에서 그는 홀로 허공을 향해 트럼펫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눈부신 무반주 카덴차. 최고 음까지 거침없이 치솟았다가 부드러운 아르페지오로 내려앉는 그 짧은 독주는, 반주가 깔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음악의 시간과 공간을 열어젖히는 행위 그 자체였다.

그의 다른 트랙들 역시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건넨다. 1927년의 'Potato Head Blues'에서 앙상블 악기들이 일제히 연주를 멈추는 스톱 타임(stop-time) 구간이 찾아올 때, 암스트롱은 주저하지 않고 그 빈 공간을 독주로 가로지른다. 주변의 모든 틀이 멈춰 선 순간이야말로 자기 호흡의 속도를 밀고 나갈 때라는 듯이. 심지어 1926년 'Heebie Jeebies'를 녹음하던 중 악보가 보면대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는 녹음을 중단하지 않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무의미한 음절들을 리듬 삼아 스캣으로 노래를 이어갔다. 악보라는 지도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가 의지한 것은 오직 지금 울리고 있는 소리의 흐름뿐이었다.

이 다섯 곡의 플레이리스트는 완결된 계획이 보장하는 안락함에서 벗어나, 서툴더라도 첫 음을 누르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 빅스 바이더벡이 'Singin' the Blues'에서 보여주듯 거친 돌진 대신 서정적이고 절제된 톤으로 상황의 결을 짚어내고, 마침내 듀크 엘링턴과 함께한 'Duke's Place'에 이르러서는 단 두 개의 기본 음표만으로 전체 앙상블의 스윙을 시작한다. 많은 설명이나 복잡한 전제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 두 음을 정직하게 짚어내는 손가락의 무게뿐이다.

제임스의 근원적 경험론이 가리키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경험 이전에 주어지는 순수한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는 삶의 강물 한가운데에서 헤엄치며 방향을 잡아야 한다. 배를 띄우기 전에 강의 수심과 물살을 완벽히 계산하려 드는 사람은 결국 강가에 텐트를 치고 늙어갈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이 허공을 찌르고 나갈 때, 뒤따르는 밴드의 화음은 그 첫 음이 만들어낸 진동에 감응하여 비로소 맞춰진다. 행동이 먼저 공간을 열었기 때문에 화음이라는 의미가 뒤따라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망설임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0으로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계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삶이라는 연주에서 잘못된 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음이 훌륭한 도약이었는지 아니면 어색한 빗나감이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음을 누르기 전의 망설임이 아니라 그 음을 누른 직후에 우리가 어떤 다음 음을 이어 짚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완결된 청사진이란 언제나 사후에 그려지는 기록일 뿐이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다시 책상 앞의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여전히 수많은 칸들이 비어 있고 불확실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없이 고쳐 쓰며 매만지던 체크리스트 창을 조용히 닫아도 좋을 것 같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준비해 둔 가장 단순한 작업 창을 연다. 정답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더라도, 일단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첫 문장을 써 내려간다. 허공에 울려 퍼진 그 서툰 첫 음이, 우리를 다음 생각으로 데려다줄 것을 믿으면서.

출처

  1. Louis Armstrong Hot Five and Hot Seven Recordings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cording Registry)Library of Congress원전
  2. William Jame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원전
  3. Louis Armstrong House Museum ArchivesLouis Armstrong Educational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