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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ARDS / 개념

실존주의

Existentialisme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20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가 정식화한 현대 철학의 흐름으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사물과 달리 인간은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그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실존적 자각을 뜻한다.

글
사월
발행

어디서 나온 말인가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철학적 조류를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정식화한 순간은 1945년 10월 29일 파리에서 열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전설적인 강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막 걷힌 직후, 사르트르는 '상트르 데 클뢰' 회합실에 모여든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펼쳤고, 이 강연록은 이듬해 같은 이름의 저작으로 출간되었다.

이 강연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종이 자르는 칼(coupe-papier)'의 비유를 들었다. 장인이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 때, 그에게는 이미 '종이를 베어낸다'는 분명한 목적과 제조법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 즉 칼이라는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사물의 본질(essence)이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이 도구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에 온다고 선언했다. 신이 세계의 설계도를 들고 인간을 빚어낸 것이 아니라면,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것은 인간이 먼저 세상에 존재하고, 나타나며, 정의되기 전에 무(無)로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나중에야 비로소 스스로를 정의하게 된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이나 각본 없이 낯선 세계에 먼저 던져진다(실존). 그리고 자신이 내리는 매 순간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를 직접 증명해 나간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밝힌 실존주의의 절대적인 출발점이다.

흔한 오해

실존주의는 전후 폐허 속에서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던 만큼, 그 유행의 이면에서 수많은 왜곡과 오해를 낳았다. 파리의 카페에서 검은 옷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퇴폐적 지식인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며, 실존주의는 흔히 허무주의나 무책임한 방종으로 축소되곤 했다.

첫 번째 오해는 실존주의를 '정해진 의미가 없으니 내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쾌락주의나 냉소주의로 치부하는 시선이다. 신이나 전통적 도덕이 무너졌다고 해서 인간에게 무제한의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르트르의 사유는 정반대로 향한다. 기댈 수 있는 절대적인 신의 명령이나 정해진 본성이 없기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 온전히 자기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환경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내 기질이 원래 나약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라며 핑계를 대는 태도를 사르트르는 '나쁜 신앙(Mauvaise foi, 자기기만)'이라고 비판했다. 인간은 사물처럼 고정된 운명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미래로 던지는(기투, Projet)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해는 실존주의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고립된 개인주의로 오독하는 태도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무한한 자유를 누릴 때, 그 자유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향한 책임을 수반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전쟁에 침묵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인간은 불의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인간상을 지지하는 선택이 된다. 반대로 불의에 맞서 행동하기로 결단한다면, 그것은 '인간은 저항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가치를 온 세상 앞에 표명하는 일이다.

인간이 자신의 선택 앞에서 느끼는 깊은 떨림과 불안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나의 한 걸음이 모든 인간의 기준을 함께 빚어내고 있다는 거대한 연대 의식이 만들어내는 책임의 증거다.

그가 삶에서 도달한 태도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는 안락한 연구실의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라는 극한의 비극 속에서 그 자신이 직접 살아가며 온몸으로 밀어 올린 실천의 철학이었다.

1940년 프랑스군 기상관측병으로 징집되었던 사르트르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9개월 동안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전쟁과 포로 생활이라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영웅이나 비겁자로 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떤 이는 공포 앞에서 동료를 배반했고, 어떤 이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인간을 영웅이나 비겁자로 만드는 것은 태생적인 피나 성격이 아니라, 극한의 순간에 내린 구체적인 선택과 행위의 총합뿐이었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지식인 운동에 가담하여 저항의 글을 썼다. 그는 이론 뒤로 숨는 지식인을 경멸했다. 1964년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을 때, 사르트르는 수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국가나 제도가 수여하는 권위 있는 훈장이라는 딱지(본질)에 자신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귀속시키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사르트르는 완성된 기념비나 박제된 석상으로 박물관에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리로 나가 부당한 전쟁에 항의하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언제나 세계를 향해 자신을 새롭게 던지는 실천가(앙가주망, Engagement)의 길을 걸었다.

오늘 우리의 한 주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라벨과 성격 분류 뒤로 숨는 데 익숙해져 있다. 스마트폰을 켜면 나타나는 네 글자의 성격 유형, 태어난 연도에 따른 세대론, 수저 계급론이 매일 우리에게 정해진 역할을 쥐여준다.

"나는 소심한 성격이라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어", "출신 배경이 넉넉하지 못하니 도전은 무리야", "시스템이 이러니 내가 게을러지는 것은 당연해". 이러한 규정들은 당장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실패의 책임을 내가 아닌 미리 정해진 성격이나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달콤한 핑계에 안주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사물이나 도구의 상태로 강등시키고 만다.

재즈 클럽의 무대에 오른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가 낡았다고 불평하거나 음향 장비의 열악함을 핑계 삼아 연주를 중단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환경과 낯선 동료들 사이에서, 연주자는 지금 자신의 손끝으로 눌러야 할 단 하나의 음을 결단한다. 그 순간 공간을 채우는 울림은 환경의 탓이 아니라, 오직 그 연주자가 내린 선택의 증거가 된다.

우리의 한 주도 마찬가지다. 월요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어떤 태도로 하루를 시작할지, 곤란한 상황에서 핑계를 대며 물러설지 아니면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을지는 그 누구도 대신 결정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미리 만들어진 부품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상처나 타고난 성향이 오늘의 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택한 작은 행동 하나로 새로운 나를 빚어가는 일. 달콤한 핑계를 걷어내고 내 손으로 삶의 첫 음을 직접 짚어내는 그 또렷한 결단 속에 실존의 생생한 권리가 놓여 있다.

함께 읽을 에세이

자주 묻는 질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페이퍼 나이프 같은 도구는 종이를 자른다는 '본질(목적)'이 먼저 정해진 뒤에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아무런 용도나 운명도 정해지지 않은 채 먼저 세상에 내던져집니다(실존). 인간은 자신이 내리는 선택과 행위의 총합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만의 본질을 스스로 빚어간다는 선언입니다.

실존주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종이나 허무주의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신이나 관습처럼 기댈 수 있는 절대적인 핑계가 사라졌기에, 인간은 자신의 모든 선택에 대해 스스로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내가 내린 선택이 곧 '인간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온 세상 앞에 증명하는 무게를 갖는다고 보았기에, 실존주의는 무한한 자유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는 왜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고 말했나요?

인간은 스스로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일단 세상에 던져진 이상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심지어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조차 선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달콤한 권리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운명입니다.

사르트르는 어느 저작과 강연에서 이 개념을 정식화했나요?

1943년 철학 저작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출발하여, 1945년 파리의 '상트르 데 클뢰' 회합실에서 열린 전설적인 대중 강연을 엮은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에서 대중에게 명료하게 선언되었습니다.

출처

  1.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Éditions Nagel / Éditions Gallimard원전
  2. L'Être et le Néant (존재와 무)Éditions Gallimard (Bibliothèque des Idées)원전
  3. Existential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