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ZZY

ESSAY / 030

선택지를 다 쥐고도 불안한 이유

Why We Are Anxious With All Options Open

가능성을 열어둘수록 마음은 왜 더 어지러운가. 결단을 미루는 자의 마비와, 제약을 껴안을 때 열리는 삶의 방.

글
사월
발행일
주제
쇠렌 키르케고르 · 불안
열려 있는 가능성들

자정이 지난 시각, 노트북 모니터 위에는 마흔일곱 개의 인터넷 브라우저 탭이 가로로 빽빽하게 얽혀 있다. 주말에 읽으려다 며칠째 켜둔 장문의 칼럼, 다음 달에 신청할까 고민 중인 강좌의 상세 페이지, 비교해 보려고 열어둔 세 종류의 운동화 창, 그리고 언젠가 가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띄워둔 북유럽 도시의 지도까지.

손가락으로 트랙패드를 쓸어 넘길 때마다 쿨러가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낸다. 탭의 가로 너비는 글자 하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좁아져 있어서, 이제는 파비콘의 작은 모서리만으로 무슨 페이지인지 겨우 짐작할 뿐이다. 닫아버리면 다시는 찾지 못할 것 같고, 지금 읽자니 눈꺼풀이 무겁다.

머그잔에 남은 보리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고,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어두운 방 안을 비춘다. 우리는 탭 하나를 닫는 사소한 동작 앞에서도 마우스를 쥔 채 몇 번이나 머뭇거린다.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미련, 이것을 닫는 순간 어떤 가능성이 영영 지워져 버릴 것 같다는 막연한 아쉬움 때문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선택지들은 유연함의 증거가 아니라, 그 어떤 페이지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방황하는 시선의 흉터에 가깝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가능성을 최대한 많이 열어두는 것을 똑똑한 삶의 기술이라 믿게 되었다. 주말 일정을 잡을 때도 확답을 미루며 다른 제안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두고, 일을 선택할 때도 언제든 다른 길로 갈아탈 수 있는 대안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니 유연해야 한다고, 모든 문을 열어두고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안전하다고 서로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 복도를 걷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평온하지 않다.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너머의 풍경이 끊임없이 내 눈을 잡아끈다는 뜻이다. 이 방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서도 저쪽 방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왼쪽 길을 걸으면서도 오른쪽 길을 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걸음을 멈춘다. 선택지를 쥐고 있는 손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방의 온기도 누리지 못한 채 바람 부는 복도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셈이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첫머리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의 오랜 마비를 에누리 없는 문장으로 기록했다. "결혼하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 이것이 모든 삶의 지혜의 총합이다." 그는 어떤 선택을 내리든 버려진 가능성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인간은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불안의 개념》에서, 무한한 선택지를 내려다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 마비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그것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불렀다.

절벽 끝에 서서 까마득한 허공을 내려다볼 때 머리가 핑 도는 이유는, 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 허공 속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내 앞에 놓인 무한한 가능성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몸이 휘청거리는 것이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나를 부르고 있기에 영혼이 어지럼증을 앓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어떤 제약이나 고정된 책임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유영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그들은 어떤 도시에도 영구히 정착하지 않고, 어떤 사랑에도 전부를 걸지 않으며, 언제든 문을 열고 떠날 수 있는 절대적 가벼움을 누린다. 그러나 그 가벼움의 끝은 해방이 아니었다.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삶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허공을 맴돌다, 결국 자신의 무게중심을 잃고 깊은 무의미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쿤데라는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악보에 적힌 '그래야만 한다(Es muß sein)'라는 필연의 무게를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역설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공허가 된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1976년 일본 오사카의 낡은 서민 동네, 스미요시의 한 골목으로 시선을 돌린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폭 3.3미터, 길이 14미터라는 비좁고 긴 땅에 작은 2층 주택을 지었다. 당시 일본의 주택들은 채광과 통풍을 위해 사방으로 창문을 내고, 좁은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가변적인 미닫이문을 다는 등 기능의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안도는 정반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는 도로를 마주한 주택의 정면에 창문을 단 하나도 내지 않았다. 거친 회색 노출 콘크리트로 사방을 단단하게 둘러쳐, 바깥세상의 소음과 시선, 그리고 편리함이라는 헐거운 타협들을 깨끗하게 차단했다.

대신 그는 집의 한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공간을 지붕이 없는 텅 빈 중정으로 비워두었다. 비가 내리면 안방에서 화장실로 가기 위해 우산을 써야 했고, 겨울이면 살을 에는 찬 바람이 거실 문틈을 파고들었다. 건축계는 살기에 너무 불편하고 무모한 짓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나 바깥으로 난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린 그 무거운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방의 벽이 외부를 차단하자마자, 비어 있는 중정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의 각도,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며 튀어 오르는 차가운 빗방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이 싣고 오는 흙냄새가 온몸으로 선명하게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안도는 말했다.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은 온갖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바깥을 과감히 지워내는 단단한 제약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다고.

외부의 시선을 가로막은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벽과, 결단을 촉구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유는 닮아 보인다. 둘 다 가능성의 과잉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멈추고, 단 하나의 선택에 스스로를 온전히 묶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닮음은 곧 일상의 현실 앞에서 갈라진다.

키에르케고르는 가능성의 현기증을 극복하기 위해 신 앞의 단독자로서 모든 세속적 계산을 내려놓고 심연 속으로 뛰어내리는 절대적인 신앙의 비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슬랙 알림과 이메일 창을 확인해야 하는 평범한 우리에게, 그런 거룩하고 영웅적인 도약은 너무 아득하다. 우리가 마주하는 결단은 삶 전체를 건 영적 투쟁이라기보다, 오늘 저녁 약속 세 개 중 두 개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한 사람과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 서른 개의 관심사 중 스물아홉 개를 접어두고 오늘 밤 책 한 권의 마지막 장을 덮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사소한 포기들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닫힘은 두꺼운 콘크리트로 굳혀진 물질적 영구성이다. 한 번 벽을 세우고 나면 그 집은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빛을 맞이한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굳어 있는 돌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선택의 문턱 앞에 서야 하며, 어제 닫았던 문을 오늘 다시 열고, 어제 열어두었던 문을 오늘 다시 닫아야 하는 지속적인 시간의 즉흥 속에 산다.

장폴 사르트르는 결정을 미루고 가능성 뒤로 숨는 인간을 향해 '자기기만'에 빠진 비겁자라고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받았는데,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문을 닫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비겁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을 닫았을 때 영영 잃어버리게 될 다른 길들에 대한 아쉬움, 즉 기회비용에 대한 슬픔을 정직하게 떠나보내는 애도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수십 가지를 내 손으로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 버려짐에 따르는 작은 상실감과 서운함을 견디지 못하기에, 우리는 애써 모든 문에 발을 걸쳐둔 채 복도에서 서성거린다.

자유는 문을 열어두는 넓이가 아니라, 문을 닫을 줄 아는 결단의 깊이다. 연주자가 건반 위의 여든여덟 개 음을 마구잡이로 두드리지 않고, 침묵 속에서 단 하나의 음을 골라 건반을 누를 때 비로소 음악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음을 다 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달리는 연주는 소음으로 끝나지만, 다른 모든 음을 버리고 단 하나의 선율을 택한 연주는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든다. 닫힘은 결핍이나 손해가 아니다. 그것은 비어 있는 공간을 비로소 내가 머물 수 있는 방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단단한 제약이다.

노트북의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마흔일곱 개의 탭이 여전히 빽빽하게 모니터 상단을 메우고 있다.

손가락을 움직여 탭 하나를 닫는다. 찰나의 순간 화면이 가볍게 깜빡이며 창 하나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탭을 닫는다. 또 하나를 닫는다. 언젠가 읽을지도 모른다며 쥐고 있던 칼럼을 닫고, 혹시 몰라 열어두었던 비교 창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신기하게도 창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대신 어깨를 짓누르던 미세한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간다. 쿨러의 날카로운 회전음이 잦아들고, 방 안에는 오랜만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는다. 화면 위에는 마침내 단 하나의 페이지만이 홀로 남아 잔잔한 흰빛을 내뿜는다.

우리는 지금 몇 개의 문을 열어둔 채 밤의 복도를 서성이고 있을까. 문을 닫고 들어서지 않으면 결코 그 어떤 방의 온기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출처

  1. Either/Or: A Fragment of Life (Enten-Eller)Princeton University Press원전
  2. The Concept of Anxiety (Begrebet Angest)Princeton University Press원전
  3.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Harper & Row / Faber and Faber원전
  4. Ando: Complete Works 1975–Today & Conversations with StudentsTaschen /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원전
  5. L'être et le néant (Being and Nothingness)Editions Gallimard원전
  6. At the Existentialist Café: Freedom, Being, and Apricot CocktailsOther Press / Chatto & Windus
  7. Kind of Blue (Miles Davis, Columbia CL 1355)Columbia Records / Sony Music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