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31
왜 사람은 굳이 삼류 악역을 자처하는가
Why People Choose the Role of the Villain
당당하게 살 수 있는데도 왜 사람은 스스로 못난 배역을 택하는가.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면책권과 고독의 몸부림.

금요일 오후의 사무실, 대화창에는 명백한 수치 하나가 잘못 기재되어 올라와 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오타를 지적하는 메시지를 남긴 지 십여 분이 흘렀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창밖에서는 늦은 오후의 빗줄기가 유리창을 비스듬히 두드리고, 커피 머신의 모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춘다. 마침내 모니터 구석의 알림창이 가볍게 깜빡이며 한 줄의 문장이 뜬다. '그럼 제가 처음부터 다 잘못했다는 뜻인가요? 바빠서 미처 못 챙겼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순식간에 대화방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오탈자를 확인했다고 답하면 그만이었을 사소한 실수가, 누군가의 인격과 태도를 걸고넘어지는 날카로운 마찰로 번져나간다. 잘못을 짚은 사람은 졸지에 무례한 공격자가 되고, 억지를 부린 당사자는 서글픈 표정의 피해자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는다.
우리는 흔히 그런 태도를 성격이 뒤틀렸거나 악의를 품은 예외적 인간의 행태로 치부해 버린다. 나와는 다른 결함 있는 존재로 규정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하지만 그런 손쉬운 단죄는 정작 핵심을 비껴간다. 사람은 왜 스스로 당당한 주역의 자리를 포기하고, 굳이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삼류 악역의 대본을 제 손으로 집어 드는 것일까. 그 옹졸한 배역이 도대체 어떤 실존적 이득을 주고 있는 것일까.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관찰하며 기괴한 우회로 하나를 포착했다. 정직한 노력으로 타인에게 기여하며 건강한 인정을 받을 자신이 없을 때, 사람은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 타인의 관심과 에너지를 독점하려 든다. 아들러는 이를 '부정적 관심을 통한 우월성 추구'라 불렀다.
무관심이라는 차가운 고립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비난을 사서라도 타인의 시선 한가운데 서는 편이 덜 끔찍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칭찬을 기대할 수 없는 자리에서 억지를 부리며 악역을 자처하는 행위는,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가장 절박하고도 옹졸한 몸부림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자아 연출의 사회학》과 후속 연구인 《만남》에서 분석한 '역할 거리두기' 역시 같은 궤를 그린다. 무대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조명을 받는 일이지만, 실수했을 때의 책임을 온전히 홀로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실패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완벽한 주역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일부러 삐딱한 엑스트라의 가면을 쓴다. 무대가 엉망이 되더라도 '애초에 나는 이 판에 진심이 아니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안전한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아의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을 유예하려는 이 방어술은, 문학사에서 가장 어둡고 솔직한 한 인물의 고백과 겹쳐진다. 1864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인간이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매력 없는 사내다." 소설의 첫 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심술궂고 비열한 인간임을 숨기지 않는다. 당시 러시아 지식인 사회는 인간이 이성과 과학의 법칙을 따르면 누구나 이익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을 내릴 것이라 낙관했다. 2에 2를 더하면 4가 되는 오차 없는 '유리 궁전'의 질서였다.
하지만 지하 인간은 그 완전무결한 합리성의 무대를 정면으로 조롱한다. 인간은 결코 이익만을 좇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정해진 법칙대로만 움직이는 '피아노 건반'이나 부속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가장 치졸하고 파괴적인 짓을 저지른다. 그는 거리의 장교에게 비켜서지 않기 위해 기어이 어깨를 부딪치고, 자신을 동정하는 가련한 여인에게 지독한 모욕을 퍼부으며 자학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포착한 지하 인간의 독기와, 일상에서 억지를 부리며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태도는 겉보기에 닮았다. 둘 다 품위 있는 삶의 규칙을 내던지고 스스로 비열한 악역의 자리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닮음의 이면에는 결정적인 갈림길이 놓여 있다.
지하 인간의 비열함은 인간을 계산 가능한 통계 속에 가두려던 19세기 근대 합리주의에 온몸으로 균열을 낸 처절한 사상적 파열구였다. 모두가 정답만을 외칠 때, 변덕과 악의라는 불협화음을 터뜨려서라도 영혼의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를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일상의 삼류 악역들이 보이는 태도는 사상적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주역으로서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온전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엑스트라라는 패배자의 알리바이 뒤로 숨어드는 비겁한 도망이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위험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 틀렸을 때, 내 한계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부끄러움을 견뎌내는 실존적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억울한 조연'의 자리를 선점해 버리면, 실패는 더 이상 내 탓이 되지 않는다. 타인의 무례나 상황의 불공정함을 탓할 수 있는 완벽한 면책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스스로 당당히 전진하지 못하는 자들의 원한, 즉 르상티망을 해부했다. 자신의 힘으로 높이에 도달할 수 없는 자들은 높은 곳에 선 자의 발목을 잡아채 흙탕물 속으로 끌어내린다. 남의 옷에 진흙을 튀기고 나서야 안도하는 그 비뚤어진 마음은, 남의 무대를 망가뜨려서라도 자신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장 서글픈 복수극이다.
재즈 앙상블에서 연주자가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소리를 정직하게 귀담아듣고(Listen & Respond), 그 소리에 맞춰 자신의 취약성을 노출하며 다음 음을 쌓아 올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잘못 짚은 음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다음 마디에서 그 실수를 새로운 화음의 재료로 품어 안을 때 합주는 계속된다.
그러나 악역을 자처하는 태도는 철저한 경청의 거부다. 상대의 지적을 듣는 순간 자신의 결함이 폭로될까 두려워, 귀를 닫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억지와 소음만을 쏟아낸다. 재즈에서 불협화음(Tension)은 다음 마디의 해결을 위한 창조적 긴장이지만, 악역은 불협화음 자체를 상대를 찌르는 영구적인 무기로 삼아 합주 전체를 마비시켜 버린다.
사무실의 시계가 오후 여섯 시를 가리킨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대화방에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다.
상대의 뾰족한 한마디에 치밀었던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거친 말 뒤에 웅크리고 있는 초라한 뒷모습이 비로소 보인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자아가 무너져 내릴까 봐, 온몸에 엉성한 가시를 세운 채 떨고 있는 서툰 엑스트라의 실루엣이다.
그리고 질문은 거울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자주 그 알량한 배역의 유혹에 기댔을까. 내가 틀렸음을 알면서도 부끄러움을 마주하기 싫어 지레 삐딱선을 타거나, 남 탓을 하며 억울한 조연의 자리로 물러선 적은 없었을까. 내 삶의 무대 위에서 정직하게 실패할 용기가 없어,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손쉬운 악역의 가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가.
출처
- Notes from Underground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Vintage Classics / Everyman's Library원전
- Understanding Human Nature (Menschenkenntnis) & What Life Could Mean to YouGreenberg Publisher / Little, Brown and Company원전
-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 EncountersDoubleday Anchor Books / Bobbs-Merrill원전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Zur Genealogie der Moral)Cambridge University Press원전
- Dostoevsky: A Writer in His TimePrinceton University Press
- Mingus Ah Um (Charles Mingus, Columbia CS 8171 / CL 1370)Columbia Records / Sony Music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