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12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용기
The Courage to Say My Mind Has Changed
완벽했던 논리를 스스로 폐기한 비트겐슈타인과 즉흥의 재즈가 일상의 일관성 강박에 건네는 말.

오후 네 시의 회의실, 서쪽 유리창 너머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늦은 가을 햇빛이 회의용 테이블 위에 길게 드리운다. 테이블 중앙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컵 속 커피가 반쯤 남아 있고, 천장에 매달린 빔프로젝터 팬이 낮게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사람들의 어색한 침묵 사이를 채운다.
몇 분 전 자신이 확신에 차서 내뱉었던 주장의 결정적 허점이, 맞은편 동료의 짤막하고 차분한 질문 하나에 덜컥 드러난 순간이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의 논리가 틀렸다는 계산이 빠르게 끝났다. 상대의 말이 옳고, 자신이 전제했던 데이터와 근거가 어긋났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등 뒤로 서늘한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시선은 굳이 다시 들여다볼 필요도 없는 발표 자료의 표와 그래프를 무의식중에 반복해서 훑어 내린다.
틀렸음을 알아차린 순간 우리는 왜 곧바로 '내가 틀렸다'거나 '생각이 바뀌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가. 가슴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자존심과 당혹감은 굳게 다문 입술 뒤에서 어떻게든 논리의 틈을 기워 붙일 핑계와 부연 설명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게 만든다. 차라리 회의실의 공기가 이대로 굳어버리기를 바라는 유치한 마음마저 고개를 든다.
족쇄가 된 어제의 일관성
우리는 어려서부터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면 줏대가 없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조직과 사회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을 뚝심이나 신념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해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일관성에 대한 강박이 우리의 생각을 가장 좁은 방 안에 가둔다. 자기주장을 번복하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올렸던 전문성과 발언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백한 오류 앞에서도 결코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 이미 허물어져 버린 논리의 담벼락을 지키기 위해 더 거친 목소리와 복잡한 전문 용어를 동원해 억지를 부리고, 상대방의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논점을 흐린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스로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맞닥뜨리게 될 자기부정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제의 내가 내뱉었던 단정적인 문장이 오늘의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순간이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패배에 불과한 것일까. 왜 우리는 변화된 상황과 새로운 진실 앞에서 과거의 내 말에만 맹목적으로 충성하려 드는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허무는 일은 나약함의 증거인가, 아니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또 다른 지적 용기인가.
시골 학교의 흙먼지와 부서진 성채
1921년, 청년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를 세상에 내놓으며 철학의 모든 본질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확신했다. 언어는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정확하게 모사하는 완벽한 그림이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긴 뒤, 오스트리아에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주변 예술가와 가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홀연히 학계를 떠났다.
그가 찾아간 곳은 오스트리아 남부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트라텐바흐, 하스바흐, 푸흐베르크 같은 산골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시골 초등학교 교사이자 수도원의 정원사 조수로 일하며 비트겐슈타인이 마주한 것은 논리학 책 속의 매끄럽고 완벽한 기호가 아니었다. 흙먼지를 묻힌 아이들이 서로 소리치고, 장난을 치고, 벽돌을 나르며 부르는 거칠고 제각각인 일상의 말들이었다. 그 살아있는 언어의 생명력과 무수한 변수 앞에서, 그가 젊은 날 세웠던 완벽한 논리 체계는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과거 확신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과거의 자신을 가장 가혹하게 비판하며 후기 사유의 문을 열었다. 1953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가 고정된 논리적 지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실천적 행위, 즉 '언어놀이(Sprachspiele)'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한 번 완성했던 철학의 거대한 성채를 스스로 허물어버림으로써 진정한 사유의 길을 열었다.
악보 밖의 불협화음과 마주할 때
정해진 악보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연주자는 연주 도중 빗나간 음이 튀어나왔을 때 당황하며 연주를 멈춘다. 그러나 재즈의 앙상블에서 연주자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어긋난 음과 불협화음에 즉각 귀를 기울인다. 연주 도중 실수가 발생했을 때 중요한 것은 실수를 부정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마디에서 그 음을 어떻게 받아안고 새로운 프레이즈로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재즈의 즉흥 연주는 실수를 억지로 지우려 애쓰는 대신, 예상치 못한 소리에 귀를 열고 방향을 틀어내며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의 완벽한 체계를 스스로 부수고 후기의 언어놀이로 나아간 장면과, 재즈 연주자가 불협화음에 반응해 즉흥적으로 선율을 바꾸는 장면은 얼핏 같은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세계가 갈라지는 지점은 명확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전향은 논리학적 엄밀함의 한계와 세계의 실재를 직면했을 때 터져 나온 필연적인 자기 갱신이었다. 그는 지적 체계의 한계에 부딪혀 사상을 바꿨다.
반면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버티는 이유는 논리적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다. "저 사람은 왜 말이 자꾸 바뀌어?"라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 일관성을 잃는 순간 신뢰를 잃을 것이라는 불안, 그리고 어제의 나 자신을 배신했다는 내면의 죄책감이 우리를 과거의 확신에 단단히 묶어둔다.
비트겐슈타인의 고뇌가 논리의 완벽함이라는 지적 허상을 깨부수는 일이었다면, 일상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일관성이라는 갑옷' 뒤에 숨어있던 나약한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물론 원칙도 기준도 없이 상황에 따라 매번 말을 바꾸는 기회주의적인 변덕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과 상대방의 정당한 이유를 확인하고도 이전의 내 말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아집에 불과하다.
악보에 없는 음이 튀어나왔을 때 얼굴을 붉히며 연주를 중단하는 사람과, 그 낯선 울림에 귀를 열고 다음 마디의 새로운 화음을 시작하는 사람의 차이는 기교가 아니라 용기에 있다. 고정된 신념에 매달리는 것은 강인함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직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정직하게 방향을 트는 용기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회의실을 나선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 나오며 방금 전 자신이 붙들고 늘어졌던 고집스러운 말들의 무게를 가만히 가늠해본다.
우리는 매 순간 변하고,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와 타인 역시 단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제의 판단이 오늘의 진실과 다를 때, 슬그머니 고집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틀렸던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닫혀 있던 대화의 문이 비로소 활짝 열린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일관성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오류를 딛고 살아있는 세계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숙하고 정직한 즉흥성이다.
당신이 최근에 자신의 고집스러운 확신을 내려놓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출처
- Ludwig Wittgenstei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tanford University원전
-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Penguin Books원전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Project Guten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