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017
삶이 아무리 거칠어도 내 목소리까지 거칠어질 필요는 없다
Why Your Voice Does Not Have to Be Harsh
세상이 나를 할퀼 때 똑같이 비명을 지르는 대신 톤을 한 단계 낮추는 일에 관하여.

퇴근길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어깨가 거칠게 부딪혔을 때, 귓가에 꽂혀 있던 무선 이어폰 한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의 무표정한 구두와 운동화가 스쳐 지나가는 타일 바닥 위를 뒹구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주워 올리며, 부딪힌 사람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순간 목구멍 언저리까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뒤통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고 싶고, 방금 나를 할퀴고 간 그 무신경함에 똑같이 날 선 고함으로 되갚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긴다. 하루 종일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시달렸던 날카로운 피로와 모욕적인 순간들이 그 찰나의 마찰을 틈타 일제히 불을 뿜으려 한다.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어 걸어두고 조용한 방 안의 불을 켜지 않은 채 식탁 의자에 앉는다. 차가워진 손가락 끝으로 이어폰 표면을 쓸어내리며 생각한다. 우리는 왜 상처를 입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의 볼륨을 높이고 똑같이 험악한 톤으로 되받아치려 하는가.
소란에 맞서 포효했던 정직한 분노
세상이 나를 향해 날을 세울 때, 똑같이 거친 목소리로 맞받아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반응이다.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 인상을 찌푸리고, 상처를 입었을 때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부조리 앞에서 표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정직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의 재즈 무대에서 이 타오르는 분노를 가장 거침없이 뿜어냈던 인물은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였다.
밍거스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위선, 무대 위의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 결코 우아하게 타협하지 않았다. 1959년 앨범 『Mingus Ah Um』에 실린 〈Fables of Faubus〉에서 그는 아칸소주 리틀록의 학교 통합을 군대를 동원해 막아섰던 인종차별주의자 주지사를 향해 무대 위에서 거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베이스는 점잖게 박자를 쪼개는 대신 악기가 부서질 듯 줄을 때리는 거친 타격음을 쏟아냈고, 금관악기들은 찢어지는 불협화음으로 시대의 폭력을 고발했다.
밍거스의 음악은 거짓된 평화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세상의 추악함과 개인적인 고통을 감추지 않고, 온몸으로 포효하며 무대 위를 뒤흔드는 것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켰다. 그것은 상처를 입었을 때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가장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정직한 투쟁의 방식이었다.
무너진 삶의 가장자리에서 건져 올린 숨결
하지만 재즈 역사에는 세상의 소란과 개인적인 파멸 앞에서 밍거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 'The Sound'라는 찬사로 불렸던 테너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다.
게츠의 사생활은 참혹할 만큼 무질서하고 파괴적이었다. 십 대 시절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헤로인과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과 이혼, 그리고 1954년 시애틀에서 금단 증상을 견디지 못하고 약국을 털려다 권총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사건까지, 그의 일상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소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대 위에 서서 색소폰을 입에 물었을 때, 악기의 벨에서는 단 한 번도 거칠게 찢어지는 비명이나 혼란스러운 분노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1961년 작곡가 에디 소터와 함께 완성한 앨범 『Focus』를 들으면, 현악 오케스트라가 현대음악처럼 복잡하고 격렬한 불협화음으로 질주하는 가운데 게츠의 테너 색소폰은 마치 거친 파도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한다. 1963년 조앙 질베르토와 함께한 『Getz/Gilberto』에서도 그는 리듬에 억지로 힘을 주지 않고, 공기를 스치듯 맑고 절제된 서정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저토록 망가진 인간의 몸에서 저토록 천사 같은 소리가 나오는가라며 혀를 내둘렀을 만큼, 게츠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혼란과 고통을 소리로 배설하지 않았다. 그의 색소폰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맑고 부드러운 숨결로 세상을 감싸 안았다.
두 개의 저항, 두 개의 대가
세상의 폭력과 내면의 상처를 통과할 때, 사람이 소리를 내는 방식은 전혀 다른 결을 띤다.
밍거스의 거친 포효와 게츠의 투명한 부드러움 중, 과연 어느 쪽이 세상의 고통을 대하는 더 진실한 태도인가?
밍거스의 포효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세상의 불의와 구조적 폭력 앞에서는 타협 없는 분노와 거친 비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점잖은 침묵이나 온건한 미소는 때로 가해자의 폭력을 용인하거나 방조하는 공범이 되기 때문이다. 밍거스가 무대 위에서 내질렀던 고함은 거짓된 평화를 깨뜨리고 세상을 뒤흔드는 가장 정직한 용기였다.
하지만 그 분노의 불길은 언제나 거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세상의 모든 부딪힘과 사소한 마찰마다 날을 세우고 소리를 지르다 보면, 결국 그 불길은 타인을 태우기 전에 연주자 자신의 일상과 내면을 먼저 갉아먹는다.
반면 게츠가 보여준 절제는, 내면이 아무리 파멸 직전이어도 악기라는 좁은 호흡관을 통해 나가는 소리만큼은 결코 세상의 오물과 폭력으로 더럽히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자기 존엄의 선택이었다. 상대의 거친 주파수에 말려들지 않고 목소리를 한 톤 낮추는 일은, 세상의 소란이 내 삶의 질감까지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얇지만 단단한 방패가 된다.
그러나 이 온화함 역시 모든 상황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내면의 소란을 홀로 삭여내며 겉으로만 맑은 소리를 지켜내는 일은 막대한 실존적 피로를 남기며, 세상의 구조적 불의를 직접 무너뜨리지도 못한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분노의 포효가 침묵을 깨뜨리는 칼날이라면, 부드러운 절제는 소란의 증폭을 막아서는 방패다.
오늘 밤 내가 선택할 목소리
어두운 방 안에서 재킷을 벗어두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둔 채, 하루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갔던 거친 말들과 눈빛들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세상은 매일 우리에게 묻는다. 날 선 공격과 부당함 앞에서 밍거스처럼 온몸으로 분노를 터뜨려 균열을 내야 할 순간인가, 아니면 게츠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내 목소리의 서정성과 온도를 지켜내야 할 순간인가.
퇴근길의 작은 부딪힘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톤을 낮추고 조용히 돌아선 것은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내 소중한 하루의 결을 타인의 무례함으로 오염시키지 않기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비명으로만 응답할 필요는 없다. 거친 세상 속에서도 내 목소리의 높낮이와 온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그것은 매일 밤 불 꺼진 방에서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건네야 할 조용하고 깊은 질문이다.
출처
- Stan Getz: A Life in JazzWilliam Morrow & Co. / HarperCollins원전
- FocusVerve Records / Discogs원전
- Getz/GilbertoVerve Records / Discogs원전
- Mingus Ah UmColumbia Records / Discogs원전
- Myself When I Am Real: The Life and Music of Charles MingusOxford University Press원전